자전적 수필,시

◇ 세상은 보는 대로 보인다.

이원아 2011. 11. 24. 12:00

◇ 세상은 보는 대로 보인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보게 될 때 그 사람의 대표성만을 결정 지어 판단하려는 속성. 즉, 일정한 틀이 있는 데, 이것이 바로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없는 편견이고 고정관념이다.”

2010.04.20

  <우물안의 개구리는 제눈에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다>

   

  사람은 눈이 하나 더 있다. 즉, 마음의 눈이다. 그래서 사람은 이 눈으로 허상虛像도 본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실상實像이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은 실상과 허상을 같다고 보는 것이다. 즉, 세상 모든 것은 내 생각이 만든 것이니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곧 색이요 공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이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색과 공은 다르게 보이는 것 같지만 다 같다는 것이 불교의 교리인 것이다.

  실상을 보는 눈은 누구나 다 똑같이 보인다.  그러나 당장 눈에 보인다고 해서 다 같은 실상은 아니다. 그 것은 누구나 하나 더 가지고 있는 마음의 눈으로, 생각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형상은 제 각각일 수 있다.

  나는 요즈음은 전용 이발소에 잘 가지 않고 동네 목욕탕에 딸린 이용원에서 목욕 겸 그 곳에서 이발을 한다. 이곳은 면도해 주는 어여쁜 면도사 아가씨도 없고 이발사도 성의 없이 대충하고 면도는 뒤 머리 부분만 설렁설렁해 주고 만다. 그런 것이 불만이면 전용 이발소에 가야한다.

  요즘은 미장원에서도 남자의 머릴 손질해 주는데, 이곳은 더 형편없는 것 같다. 남자의 머리를 남자의 머리 스타일로 보지 않고 여자의 머리 모양으로 커팅을 해 주니까 좀은 이상하게 보이지만, 싼 맛에 다닌다는 사람도 더러 있다. 내가 다니는 헬스장에서 근무하는 이발사는 단골회원들의 이발하는 날을 잘도 기억해 낸다.

  머리 커팅 할 때가 지났다느니 좀 이르다느니 하면서 온통 드나드는 사람들의 머리카락에만 온통 신경 쓴다. 그 사람 눈에는 다른 것은 잘 안 보인다. 오로지 남의 머리만 처다 보기 때문에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은 남의 머리 뒤통수 머리털만 보인다. 시내 길 옆 모퉁이에 구두 닦는 아저씨는 자기 앞을 지나다니는 행인들의 발만 처다 본다. 다른 것은 그저 거기 있을 뿐 처다 보지 않는다. 역시 구두닦이 아저씨도 자기가 보는 만큼만 보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를 사고 싶으면 평소 자동차만 보인다. 버스를 타도 자동차만 보이고 전철을 타도 지나가는 자동차만 처다 보게 된다. 대화 자체를 자동차 이야기에만 신경 쓴다. 저기 지나가는 저 수많은 자동차 중에 혹시 내가 점찍어둔 모델이라도 지나가는 것이 보이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를 살펴가며 자세히 처다 보려고 한다. 그보다 더 좋은 차가 얼마든지 있건만 다른 것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자동차만 눈에 보인다.

 

  어릴 적에 어머니를 따라 장에라도 가는 날에는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뱅뱅 도는 것이 있다. 골라보았자 흙 백 운동화뿐인데, 어느 것을 골라 살까하고 마음의 동요가 일기 때문이다. 고무신도 한 켤레 필요했지만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장터에 몇 개 안되는 난장의 신발 좌판대와 근사하게 진열해 놓고 파는 고급가게만 자꾸 눈에 들어온다.  장날이니까 어머니께서 무얼 사시는지 누구와 이야길 하시는지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빨리 신발을 사고 싶은 욕망으로 다른 것은 눈에 안 들어온다. 단지 나하고는 별 볼일 없는 노점 장날 물건들이다.

  아버지의 승인 하에 어머니께서 큰마음 먹고 사주신다는 운동화의 색깔만 눈에 들어온다. 그러면서 다른 친구들이 신고 다니는 운동화 발만 처다 본다. 지금 같이 상품의 다양화에 의한 브랜드 가치를 따지는 시대가 아니더라도 다른 친구들이 신고 다니는 신발만 보인다. 신발을 사려하기에 오로지 신발만 눈에 들어와 그것만 보인다.

  내 친구 K 모 부인은 음식 솜씨가 있어서 이를테면 이바지 음식이나 돌잔치음식 등을 잘 만드는데, 그의 부인은 TV에서 음식 화면만 돌려가며 본다고 투덜거렸다. 즉, 부인이 다른 프로그램은 안 보기 때문에 자기와 늘 리모트컨트롤 다툼이 있다고 했다. 그 부인에겐 식재료, 요리 방법, 맛내는 방법, 상 차리는 방법 등 음식에 관련 된 것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런 프로만 선호하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젊은 엄마들은 아기 관련 프로그램이나 옷, 장난감 등만 눈에 들어온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기필코 그걸 사려드는데, 아이의 마음은 별개다. 한 번 눈에 들어 온 그것 밖에 안 보인다. 폐지를 주워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온 통 다른 것은 안 보인다. 오로지 건물 밖에 내 놓은 폐지만이 눈에 들어온다. 폐지는 그 사람의 생계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절박한 대상인 것이다.

남녀 사이에서도 그렇다. 서로 한번 휠이 꽂히면 다른 상대는 안중에 없다. 그가 하는 짓이면 무얼 하든지 좋게만 보이고 예뻐 보인다. 눈에 뭐가 씌었다고들 말한다. 그렇게 정이 들면 세상의 다른 사람들은 내가 좋아하는 상대보다는 못하다고 느껴져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기 않기 때문에 서로 상대를 다 알지 못하는 것이고, 또 나만 처다 보라고 요구하기 때문에 더욱 상대의 단점은 깊숙이 숨겨둔 채 결혼을 하게 된다.

  함께 오랜 기간 살다보면 이것이 밖으로 나타는 즈음에는 심각한 문제로 불거져 파탄에 이르게 하는 단초端初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사람은 자기가 보려고 하는 곳만을 보기 때문에 마음의 눈을 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말이 이렇게 딱 들어맞을 줄이야!

 

  언젠가 오랫동안 낚시터에서 사용하던 란탄전등의 전구電球가 나갔다. 전구만 따로 사서 리필하면 겉은 멀쩡하니깐 새것처럼 다시 쓸 수 있기 때문에 평소 철물점이 내 사무실 근처에 있는 것도 모르고 다른 곳에서 그걸 찾는데 제법 시간을 소비해 가며 헤맸든 적이 있다. 평소에 지나다니며 보았을 터인데 그저 신경 안 쓰고 지나쳤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눈으로 보았지만, 허상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새겨 놓지 않았기 때문에 가까이 두고 먼 곳에서 헤매는 수고를 했던 것이다.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형상으로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고, 여러 생각을 깊게 하게 된다는 뜻이므로 폭 넓게 사고할 수 있으며 형상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선각자들이나 구도자들은 두 눈으로 사물은 보지 않는다. 눈으로 보이는 형상들은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보아야 할 생각을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내면內面의 눈으로 볼 때는 같은 형상을 놓고서도 다르게 보고 다른 사고로 해석하여 자신의 마음의 눈을 항상 깨끗이 하려 든다. 그래서 생각이 맑으면 마음의 창도 맑아지는 것이며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 외곬스레 눈으로 보이는 것만 집착하게 되는 뭇 사람들의 생각과 다른 것이 여기에 있는 것이며, 보이는 대로만 보기 때문에 바닷가에 사는 사람일지언정 바다가 잘 안 보이는 것이며, 산 속에 사는 사람일지라도 진정 참다운 산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의 눈으로 보게 되면 바다도 보이고 산도 보인다. 물속도 보이고 삼림森林도 다 보인다.

  무수한 별 빛이 바다에 쏟아져 내리는 밤바다를 이야기 할 때 보통 사람들의 바다는 그저 파도가 일렁이는 물로만 보일지 모르나 마음의 눈으로 함께 보는 바다는 별빛과 조명이 바다 위에 떨어져 현란하게 빛나는 가운데 바다 전체가 가슴으로 다가와 많은 사고의 문이 열리기 때문에 확연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람의 마음의 창은 라디오 튜너Tuner와도 같다. 라디오는 내가 튠Tune하는 대로 다른 소리가 들린다. 듣기 싫은 소리는 다른 데를 틀면 되고 아름다운 선율을 들으면서 기분전환 하려면 골라 틀면 되는 것과 같이 내 마음의 눈도 내가 돌리는 대로 보이게 된다.

 

 사람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 한다.

  태양은 분명 지구를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침이 되면 동쪽에서 해가 뜨고 저녁이 되면 서쪽으로 지는 모습이 꼭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16C에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라는 역발상의 생각은 1400년 동안 천동설天動說을 주장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 얼마나 웃음거리, 혹은 미친놈의 생각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기에 당시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폴란드. 1473-1543)같은 천문학자들은 이 연구를 얼마나 가볍게 보았겠는가?

  그 뿐만 인가? 천체 망원경으로 지동설을 확인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이탈리아. 1564-1642)같은 천문학자는 까닥하면 교수형을 당할 뻔하기도 했었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아니다 둥글다.’라고 주장한 사람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한다고 그 사람을 죽이려고까지 했으니 편견과 고정관념이 얼마나 무서운 생각인가?

  또 한 예를 보자. 요즈음 KTx열차를 타보면 개․집찰구에서 관계직원이 나와 서서 소위 차표라는 것을 검표하거나 집표하지 않고 완전히 오픈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객을 믿지 못하겠다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에서 고객 중 누가 공짜로 기차를 타지 않는가를 지켜보고 감독했었지만, 요즈음엔 이곳이 담당직원은 보이지 않은 채 완전히 개방되어 이용자들이 각종 표지판과 안내방송대로 물 흐르듯이 순조롭고 안전하게 열차를 탑승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매우 자연스럽기도 하고 한편 격세지감隔世之感도 느낀다.

 

  한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내가 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대로 느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름답고 선한 마음으로 보아야하지 편견이나 고정관념으로 보면 한 쪽만 보인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보게 될 때 그 사람의 대표성만을 결정지어 판단하려는 속성屬性. 즉, 사람을 보는 일정한 틀이 있는 데, 이것이 잘 못되면 바로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없는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된다. 오로지 한 쪽에 다른 생각을 감춰두고 우선 큰 소리부터 내는지 잘 살펴야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중호지필찰언衆好之必察焉하며 중오지필찰언衆惡之必察焉이라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옳다 해도 살필 것이요 그르다 해도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으로 속단하지 말고 이래도 살펴보고 저래도 살펴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편견偏見에 사로잡힐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편견이나 고정관념은 좋은 생각들이 들어 갈 틈을 내 주지 않는 단점이 있는 것은 물론 견리사의見利思義하지 않고 견리망의見利忘義. 즉, 이익을 보면 의리를 잊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어서 명분 없이 처신하려 들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축록자불견산逐鹿者不見山이라. 사슴을 쫒는 자는 산이 안 보인다는 말이다. 사냥꾼은 산 같은 거 돌아 볼 겨를이 없다. 오로지 목표로 정한 사슴만을 쫒으려 하기 때문에 그것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정관념은 이 사냥꾼과 같이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위해 일관되게 한 우물을 파는 선택과 집중集中에 의한 사고와는 아주 다른 말이다. 따라서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둘러싸인 사람들의 통관규천通管窺天하는 사고는 붓 대롱을 통하여 하늘을 엿보려 하기 때문에 소견이 좁아 자기 밖에 모른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생각은 눈에 보이는 형상만으로 세상을 살려고 하기 때문에 생각들이 한 쪽으로 쏠리어 평형을 이루지 못하고 ‘모 아니면 도’란 식으로 편을 갈라놓고 반목이 생겨 서로 질시嫉視함으로서 갈등의 골이 깊어져 결국 등을 돌리는 위기를 맞는다. 오픈된 생각과 정심正心의 눈으로 보면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찡그리고 있는 그 모습이 바로 나의 형상이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손가락질 하는 모습이 바로 나의 실상이라는 것이 보인다.

  그가 어제의 나일 수 도 있는 것이며 타산지석他山之石과 반면교사反面敎師인 것이기 때문에 선입견先入見이나 편견으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 좀 추상적抽象的인 말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마음의 창을 열고 다른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의 입장을 알게 될 것이고, 일단 이해하게 되면 지금까지의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벗어나 다른 형상으로 보이게 됨으로서 상대방에게 보원이덕報怨以德할 길이 생기는 것이며 아울러 서로 윈Win-윈Win하는 상보상성相補相成의 길도 보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