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문학기행-횡간도 귀양살이 체험
◇ 문학기행-횡간도 귀양살이 체험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비록 하룻밤 머물다 떠나온 횡간도에서의 짧은 체험이었지만, 소중한 추억을 가슴에 담고 떠나온 셈이니 저마다 느끼는 마음은 만리장성을 쌓는 심정으로 다양한 장르의 문학 소재로 승화昇華될 것이 분명하다.”2012.11.30
<오른 쪽에서 두번째가 서경남 회이다>
“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책을 한 페이지밖에 읽지 않은 것과 같다.” 고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영국. 대주교, 사상가)가 일찍이 말한바와 같이 여행은 재미있는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과정과 같은 것이다. 즉 여행을 통해 내 사고의 폭을 넓혀가며 경험하 는 것과 그로 인해 삶의 활력을 찾는 것은 마치 재미있는 책을 읽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여행은 여건만 허락한다면 무조건 떠나야 한다.
내가 ‘떠남의 미학’에서 이야기한바와 같이 여행을 하기 위해 떠남은 새로운 곳에 대한 궁금함을 풀기 위함이며 새로운 것을 보고 배우는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떠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용기 있는 자가 먼저 얻는다고 했다. 뭘 하러가든 가고 싶은 곳을 향해 용기 있게 떠나보자.
나는 새로운 섬 여행을 위해 지난 11월 23일부터 26일까지 요즘 내가 속한 가산문학회원들과 함께하는 추자도 문학기행-횡간도橫干島 귀양살이 체험-을 다녀왔다. 지난여름 홍도, 흑산도의 섬 여행에서 섬에 대한 많은 것을 관광하고 나서 금년 들어 이번이 두 번째 섬 여행이다. 섬 여행은 뭍에서의 여행과는 또 다른 맛이 풍기는 것이 특징이다. 모든 생활이 바다와 함께하는 삶이기 때문에 육지에서의 그것과는 많은 면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은 특히 친구들 모임도 아니고 동창모임도 아니며, 친인척이나 가족여행도 아닌 전혀 생소한 문우文友들과 이 기간 중 횡간도라고 하는 오지 섬마을에서 1박 2일간에 걸쳐 ‘귀양살이 체험’ 여행을 한다는 것이 색다른 여행이 될 것 같아 기대가 되었다. 또 그 섬은 추자도를 거처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말로만 듣던, 그래서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은 섬이었기에 나의 섬 여행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제주항으로부터 약 50km 떨어진 섬 속의 섬 추자도. 옛날에는 외로운 섬이었을 추자도는 현대화 되어 요즘은 쾌속선으로 많은 육지의 관광객들이 찾고 있었는데, 이 섬은 상·하추자도와 추포도 그리고 횡간도 등 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로 되어 있는 군도群島이다.
‘비껴서 길게 누워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횡간도는 추자도에서 북동쪽에 위치한 낙도인데, 마침 이 섬에서 유년시절까지 살다가 가산문학회 회원이자 건축사협회회원인 서경남 씨가 살았던 고향을 ‘귀양살이 체험’ 장소로 정하고 찾은 곳은 그야말로 섬 속의 섬이며, 현재도 할머니 몇 분과 낚시꾼들에게 편의를 제공해 가며 생업을 잇는 젊은 부부를 포함해 6가구 밖에 살고 있지 않은 오지마을이다.
서경남 시인은 나와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
오래 전에 조방앞에 허름한 사무실 하날 얻어 그룹지어 밤늦게까지 건축사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공부할 때 만나 같은 날 건축사가 된 점과 주경야독晝耕夜讀하던 때 같은 대학과 대학원의 후배로서 늦깎이 공부를 한 동문도 되는 것이며, 그가 이 문학회 회원으로 나를 소개하는 바람에 이 회의 회원으로 함께 활동할 수 있게 해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가산문학회 정훈교 회장을 비롯한 박미옥 총무국장, 서경남 감사, 채동호, 심상금 부회장 부부. 권 철, 김민갑 회원 등 8명의 회원들이 김해공항 대합실에서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으며 회원들이 다 참석하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으나 떠남을 기다리는 일행들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서경남 회원은 벌써부터 기상악화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가 어제부터 알아 본 바로는 그 쪽의 기상이 썩 좋은 편이 아니라고 했다.
횡간도까지 가는 선편船便은 날씨와 직접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한 쪽의 기상 악화가 있으면 출항이 금지되거나 지연되기 때문에 그 다음 여행스케줄을 다시 계획하여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오래 전에 계획된 여행인지라 일단 제주까진 떠나야 한다.
탑승수속 장은 금요일 이른 시각이었는데도 제주를 가려는 여행객들과 많은 남녀 골퍼들의 가방이 눈에 띄게 보였고, 그들 틈에 끼어 우리 일행들이 4일 동안 먹을거리인 여러 개의 짐 꾸러미들과 여장旅裝을 부치고 탑승수속을 끝냈다.
8시 10분인 이륙시각까진 약간의 시간이 남아있어 벤치에 모여 앉아 출발을 대기하고 있으니 심상금 부회장으로부터 하얀 백설기 떡을 일일이 건네주며 먹으라고 권한다.
일찍 나오느라 아침 식전일 테니 아침식사 대용이라 했다. 하나씩 받아 들고는 “아이고, 뭐 이런 걸!”하는 눈치였지만 아이들도 아니고 어른들이 하얀 떡 조각 하나씩 입에 물고 맛있게 먹는 모습들이 꼭 어른아이 같아 우스운 모습들 이었지만 회원들을 위한 그녀의 준비성과 성의를 고맙게 여기며 맛있게 먹는 모습들이었다.
나는 밥과 떡이 있으면 떡을 먼저 먹고 밥을 먹는 사람이라 할 만큼 떡을 좋아한다.
떡을 먹을 기회가 있으면 절대로 사양하지 않는다. 떡 먹는 행복감에 젖은 채 내 몫으로 받은 두 개의 떡 쪼가리를 한 자리에서 맛있게 다 먹어치웠다.
제주 여행은 여러 차례 다녀왔었지만, 여행한 지 10여 년이 되는 때이니 이 번 여행은 꽤 긴 텀이 있어서 그간 얼마만큼 변해 있을 것에 대해 다소 기대가 되었다. 탑승수속이 끝나고 기내에 자릴 하고 앉아 있으니 학창시절 친구와 함께 목포에서 목선을 타고 무전여행無錢旅行을 처음 떠났던 기억이 새롭게 떠올랐다.
당시 처음 배를 타보는 촌놈이라 그런지 한창 청년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배 멀미가 너무 심해 고생한 그 기억이 오버랩 되면서 추자도와 횡간도까지 가는 동안 제발 그런 일이 없길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고 있는 사이 이륙 후 얼마 안 되는 시간 같은데 제주공항에 내린다는 안내멘트가 나왔다.
제주공항에 금방 내리니 처음 눈에 띄는 것은 가로수가 변해 있어서 이국적인 느낌이 덜했다. 수 년 전에 여행을 왔을 때는 커다란 야자수 가로수 잎을 보는 순간 마치 남국의 어느 나라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모두 후박나무 같은 수종樹種으로 바뀌어져 있어서 이국적인 맛이 덜했다.
이 여행을 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서귀포 도로는 아직도 야자수로 가로수가 되어 있어서 노랗게 익은 밀감 밭과 어우러진 모습이 정말 이국적異國的이어서 좋았었다. 추자도로 가는 연안여객터미널로 가기 위해 두 대의 택시에 나눠 탔다. 짐 꾸러미가 많으니 행동이 다소 굼떴지만 출항 시각이 얼마 남아있지 않아 바쁘게 서둘러야 했다.
9시 30분, 출항시각에 맞춰 터미널에 도착하니 기상은 별로 좋지 않으나 출항은 한다고 했다. 다행이라 생각됐지만 자꾸 바다로 눈길이 갔다. 우리 일행들이 마지막으로 핑크돌핀호라는 쾌속선에 오르자 금세 출항하겠다는 뱃고동소리가 항구 가득 울려 퍼진다. 하늘은 다소 흐리고 바람이 약간 심하게 불었다. 폭풍주의보까진 아니라 해도 풍랑이 2.5-3.5m정도라고 했으니 이만한 크기의 파도는 견뎌야 했다. 속으론 약간 긴장되었다.
그 정도의 파도에 대한 경험이 없는 터라 모든 것을 선장의 판단에 맡기고 정해진 앞좌석에 앉아 출발을 기다리자, 배는 곧 물살을 정면으로 가르며 쾌속으로 달려 나갔다. 창파蒼波에 몸을 싣고 떠나는 섬 여행의 시작이라 그런지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이었다. 배는 육중한 엔진 소릴 내며 무엇이던 헤쳐 나갈 것 같은 기세로 파도를 부수며 오로지 추자도를 향해 전진해 나갔다.
그러나 항구를 벗어나자마자 해면은 온통 흰 물결이 넘실댔다. 내 상식으로는 기상예보보다 더 큰 파도 같이 보였다. 이만한 파도를 직접 본지도 제법 오랜 세월이 흘렀다. 나는 이런 파도에 대한 안 좋은 기억 때문에 겁부터 났다.이른바 해면에 백파현상白波現象이 생기는 것은 파도가 심하게 인다는 현상이기 때문에 우리 일행은 물론 다른 승객들도 긴장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앞좌석에는 승객들이 없고 모두 뒤편 좌석으로 몰려가 앉아 있었다.
배가 앞뒤로 흔들리는 것은 어느 정도 뒤쪽이 유리해서란다. 승객들의 표정이 모두 굳어 보였다. 선창船窓은 흐려져 아무 것도 보이질 않은데다가 배가 심하게 요동을 치고 있으니 주고받는 말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냥 긴장하고 있는 모습들이 무슨 돌부처가 무리지어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다 좌석 사이를 지나는 승객들은 중심을 잃을 정도로 흔들림이 심해 배는 바람에 흩날리는 종잇장처럼 롤링과 피칭을 하면서 심하게 흔들려 우릴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제일 먼저 박 총무가 불편해 했다. 그러나 20여 분을 지나자 멀미엔 자신하고 있던 나에게도 신호가 왔다.
우려했던 멀미 증세가 현실로 다가 왔다. 멀미를 느낀 것은 근 40여 년만의 일이다. 하루 종일 작은 배를 타고 바다낚시를 하던 때도 그러지 않았는데, 이제 내가 나이가 들었는가 보다. 나이 탓이라고 자탄自嘆했다. 점점 심하게 속이 울렁거렸다.
창백한 내 얼굴을 보더니 정 회장이 매점에서 오징어를 사다 건네준다. 오징어 다릴 씹고 있으니 다소 진정되는 느낌이 왔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문을 여는 순간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이 화근禍根이 된 모양이다.
참을 수 없는 구토가 나를 괴롭혔다. 볼 일을 보러간 일은 보지 않고 변기통을 붙잡고 토사가 멎기를 통사정 했지만 결국 오징어 씹어 먹은 것을 다 토하고 나니 속이 편해 왔다. 얼른 갑판으로 나갔다. 니글거리는 속 울렁증은 다소 진정되는 듯 했다. 갑판위에는 안전요원의 지도 아래 벌써 여러 사람들이 죽을상을 하고 자리에 앉아 멀미가 그치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꽤 나와 있었다. 나는 핸드레일을 꼭 붙잡고 서서 밖으로 보이는 해상 날씨를 처다 보았다.
파도가 장난이 아니게 이는 그 위로 해무海霧가 끼어 항로를 지나는 사이의 아름다운 군도群島들을 볼 수 없을 정도였고, 나의 이런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고 파도를 헤쳐 나가는 스크류의 하얀 물살만이 궤적軌跡을 그리며 무서운 힘으로 힘차게 항해하는 쾌속선이 듬직해 보였다. 멀미가 다소 진정되는 때쯤 추자도 항구에 도착했다.
추자도의 여객터미날은 상추자도에 속해 있었다. 제주항에서 이곳까지 약 한 시간 여 거리를 쾌속으로 항해해오는 동안 나는 멀미를 심하게 하는 것으로 추자도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박 총무는 식은땀이 날 정도로 멀미를 했지만 다른 회원들은 잘 견디며 항해를 마쳤고, 서 감사는 행간도로 가는 배편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런 정도의 날씨에 작은 관용선이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면사무소에 가서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각자의 짐을 챙겨 추자도에 첫발을 내디디니 지금부터 섬에서의 귀양살이 체험이 시작된 것이다. 금세 멀미는 멈춰 제정신으로 돌아와 줘서 다행이었다.
나도 낚실 즐기는 사람이지만, 추자도는 낚시를 하는 꾼이라면 한 번쯤 다녀오고 싶은 바다낚시꾼들의 로망이기도 한 곳이다.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깊은 암반층으로 구성된 청정해역인데다가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해역이기 때문에 낚시가 잘 되어 감성돔을 비롯한 참돔, 돌돔, 농어 같은 어종들이 철 따라 다양하게 낚여 꾼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 때문이다.
자료에서 보니 추자도는 한반도와 제주 본섬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섬으로서 1271(고려 원종12)년까지는 후풍도로 불렸다가 전남 영암군에 소속될 무렵부터 추자도로 불렸다는 설과 조선 태조 5년 섬에 추자나무 숲이 무성한 탓에 추자도라 불렸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고 현재는 제주시 추자면에 속해 있는 섬으로서 1,300 가구에 인구 약 2,600여 명이 살고 있는 현대화 된 섬이며 주로 참조기, 멸치 같은 어업과 이 섬을 찾는 낚시꾼들을 상대로 한 생업이 있으며, 최근 시도한 다랑어 양식장에 거는 기대가 크다고 했다. 또 이곳에서는 흑비둘기, 슴새 같은 천연기념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최영장군 사당祠堂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서 횡간도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는 면사무소 소속의 행정선을 타야 한다. 그것도 섬에 들어 갈 때 편도만 운항한다는 것이었다. 먼저 면사무소를 찾아갔다. 담당자로부터 폭풍주의보가 내리기 전에는 출항한다는 안내를 받고 나와 양쪽에 돌하루방이 떡 버티고 서있는 추자면사무소 정문을 배경으로 단체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오후 1시 반, 출항시간이 남아 있어 우리 일행은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을 찾아 들어 갔다. 식당 주인은 여수에서 시집오신 분이라 했는데, 음식솜씨 좋은 전라도 여성이라 그런지 여러 가지 밑반찬이 맛깔스럽게 차려져 나와 아침을 든든하게 먹지 못한 우리 일행들에게는 충분한 영양보충이 되었다고 만족해했다.
아직도 출항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에 어판장魚販場으로 몰려갔다. 이곳의 명물인 삼치를 사기 위해서다. 삼치는 이때가 가장 크고 맛있는 철이란다. 제주의 방어와 추자도의 삼치고기를 먹기 위해 귀양살이 체험 일정을 잡은 것이니 맛보지 않을 수 없는 귀한 고기였다. 처음 들렀을 때는 삼치가 없어서 맛도 못보고 그냥 돌아 서는가 싶었는데, 마침 점심을 먹고 들르니 바닥에 크고 작은 삼치가 꽤 많이 널부러저 있는 진기한 모습이었다.
이 고기는 제철을 맞나 어판장에 들어오는 대로 팔려 나가기 때문에 오전 고기는 다 팔려 없었다고 했다. 우리들은 그 중에서 제일 큰 놈을 놓고 흥정을 했지만 값을 깍지 못하고 결국 무게가 7kg(약 1.2m정도)되는 큰 것 1마리를 7만원을 주고 샀다. 흥정이 끝나자 뚱뚱한 아주머니가 능숙한 솜씨로 얼음을 채워 내준다.
고길 파는 장사 수완手腕이 보통은 넘어 보였다. “이 중에서 제일 잘생긴 귀한 고긴데 여기까지 와서 좀 비싸더라도 깍지 말고 사 자시면 안 되냐?”는 식이었지만 걸쭉한 말솜씨 때문인지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 이제 횡간도로 들어 갈 일만 남았다. 여전히 날씨가 걱정되었지만 일행들과 먹을거리 짐 보따리를 선착장에 옮겨다 놓고 다시 나왔다. 최영장군 사당이라는 문화재가 있다 해서 그 곳에 올랐다. 추자항을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사당 안에선 향불이 모락모락 피워져 있는 것으로 봐서는 문화재 관리가 철저하게 잘 되고 있다는 느낌과 함께 장군의 영정影幀을 향해 엄숙하게 목례를 했다. 여기까지 와서 장군의 영혼을 뵙다니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출항시각이 돼 배에 오르니 걱정부터 앞섰다.
파도가 장난이 아니게 커 보였기 때문이다. 승객이라야 우리 일행인 8명뿐이었다. 우리 일행이 타도 좌석이 비좁을 정도로 작은 행정선이었다. 이 선박은 국가에서 운영하므로 배 삯이나 운임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곧이어 선원과 함께 선장이 배에 오르더니 구명조끼부터 입으라 했다. 또 긴장되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사이 항구를 벗어나는 길목에서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갈매기 떼들이 군집하여 배 위를 선회하며 날아오르니 마치 우리 일행을 환송하려는 듯한 군무群舞가 환상적으로 아름답게만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항구를 조금 벗어나는가 싶더니 배가 한바탕 요동을 치며 기우뚱거린다. 키를 잡은 선장의 앞 유리창으로 거센 파도가 들이치면서 우리들을 긴장시켰다.
일엽편주一葉片舟라 하더니 이 작은 배가 저 높은 파도를 어찌 당해 낼 것인가? 간이 콩알만 해지며 비명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배는 우릴 아랑곳하지 않고 파도를 헤쳐 나간다. 걱정부터 앞선다. 난 이런 중에 또 멀미라도 난다면 하면서 내심으론 죽을상이 되었다. 제주에서 올 때는 배라도 컸지만 이렇게 작은 배가 과연 어떻게 되지 않을까하는 노파심老婆心이 생겨나니 속으로는 더욱 불안 했다.
욕곡봉타欲哭逢打라. 울고 싶은 아이에게 뺨을 때린다는 말이다. 울고 싶어 하는 아이한테 뺨을 때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틀림없이 울고 말 것이다. 수 분이 지나서도 파도는 가라앉지 않아 넘실대는 큰 파도를 타고 넘을 때마다 오줌이 나올 정도이니 말은 안 했어도 솔직히 나는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이 항로를 나다니며 많은 경험을 했을 서 시인조차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니 더욱 불안해 체험이고 뭐고 정말 그랬으면 했다.
옛날 사람들은 이 뱃길을 조그만 돛배로 다녔을 텐데, 현대화된 선박으로 빠르게 항해하는 배를 타고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좌불안석坐不安席이니 저 만큼 보이는 횡간도가 멀게만 보였고, 처음 찾는 우리들에겐 낙도落島로 향하는 길목부터가 귀양살이를 톡톡하게 체험케 하는 것 같았다.
공포(?)의 30여 분이 지나자 멀미하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으나 악전고투 끝에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우리의 목적지 횡간도에 첫 발을 디딘 것이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고 어찌하면 기상악화로 못 올 수도 있었을 곳을 도착하고 나니 고생했던 뱃길도 잊어버린 채 금세 안도감이랄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선착장船着場이라고는 하나 달랑 조그만 선석船席 하나뿐이었고 섬을 향해 올려다보니 경사가 심해 그런지 마을은 숲에 가려있어 눈에 띄지 않고 우측 산 중턱에 이 마을에 전기를 공급해 주는 태양광발전소가 보였고 오솔길 같은 곳 한편에 설치한 녹슨 모노레일만 눈에 들어왔다.
뒤를 돌아 우리가 건너 온 바다를 처다 보니 추자도를 비롯해 무인도들이 제 자리에서 묵묵히 바다를 지키는 듯 아름답게 보였지만 바다는 여전이 하얀 파도로 가득했다. 여러 개의 짐 보따리를 카트에 실었다. 구불구불 커다란 뱀 한 마리가 산을 오르듯 무게를 겨우 견디며 느릿느릿 올라가는 카트 길을 따라 우리들도 올라갔다. 모두 지친 상태인데, 등짐으로 짊어지지 않고 그나마 그걸 이용해 꼭대기 마을까지 편리하게 짐을 나를 수 있어서 다행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발전소나 모노레일 같은 공공시설을 설치하기 위해 이런 작은 섬까지 국가예산을 투입한 걸 보면 복지국가의 작은 배려가 이곳 섬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수족처럼 쓰일 것이니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힌 채 오 분여를 오르니 약간 숨이 차오르는 듯했지만 곧 서 시인의 집에 도착했다. 드디어 우리들의 ‘귀양살이 체험장’에 도착한 것이다.
서 시인의 옛집은 바람 많은 섬지방의 특징대로 역시 울타리가 처마높이보다 높아 상대적으로 나지막한 높이의 목조 슬레이트가옥이었는데, 지금은 수년 전에 선친先親들도 다 돌아가시고 빈 집으로 남아 있어서 그런지 약간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그가 벌초나 성묘 등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찾는 이곳이 그에게는 자신의 고향이라 그러려니 해도 열악한 환경에 회원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라 신경 쓰였던지 며칠 전에 미리 다녀갔다고 하는 것을 보면 적잖이 부담을 갖고 있는 듯 했다.
시골 출신인 나야 이런 집이 낯설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마당 가득 짐 보따리를 옮겨놓고 나서 삼치 고길 먼저 어떻게 해야 했다. 선도鮮度가 가기 전에 회를 쳐야 하는데, 우리 중 누가 경험이 없으니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마침 아랫집에 사신다는 마을 분이 서 시인에게 인사차 와서는 회를 떠 준다하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는가? 선뜻 회칼을 잡더니 능숙한 솜씨로 머리는 머리대로 회와 지리거리 등을 부위별로 정리하는 모습을 보고 서있으니 빨리 회를 먹고 싶은 마음에 군침까지 돌았다.
마당에서는 삼치고기를 정리 하는 사이에 부회장인 심상금 여사와 총무인 박미옥 여사는 마치 오랜만에 시골의 친정집에 다니러온 맏딸처럼 안팎을 돌아다니며 해묵은 먼지 하나 없이 반들거릴 정도로 구석구석 쓸고 닦아대니 금방 사람 사는 운기運氣가 돌며 새집 같은 분위기로 바꾸어 졌다.
두 분은 비어있던 집이라 오래 도록 사용하지 않은 식기류와 주방 용품들을 익숙한 솜씨로 닦아 정리하며 저녁밥과 안주거릴 준비하느라 분주하니 마치 내가 어느 집 손님으로 초대 받고 대접받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특히 심 부회장은 오랫동안 도움을 받아야 할 사회적 취약계층脆弱階層 사람들을 위한 봉사활동에서 몸에 배어있는 희생정신으로 솔선, 사심 없는 성실함과 부지런함이 묻어나는 것 같아 다른 회원 모두가 감명 받았을 것이니 이 대목에서 특히 이 두 분께 감사의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태공은 근위무가지보勤爲無價之寶라 했다. 부지런함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보석과 같다는 말이니 이 두 분은 우리 문학회의 보배 같은 존재임이 틀림없으며 정말 아름답고 값진 인적 재산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두 분 정말 수고 하셨습니다.
또 유머와 위트가 뻔득이는 채동호 사장은 심상금 부회장과 부부지간인데, 이 두 분은 그들만의 장기를 이용해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잘함으로서 가는 곳마다 일행들의 웃음보가 터져 나올 정도여서 모처럼의 단체 여행이 화기애애하게 지낼 수 있었든 주역을 하였는데, 특히 손자까지 둔 50대의 부부로서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이들은 하늘이 맺어 준 인연으로 만난 부부같이 부부애가 남다르게 보였다.
함께 지내는 동안 끝이지 않는 말 재주로 사랑을 표시하거나 행동을 보여 줘서 잘 맺어진 부부의 참 모습이 모범가정의 표상 같아 타의 귀감이 될 정도의 정말 요즘 보기 드문 훌륭한 분들이라는 것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나뭇간에는 선친先親이 겨울을 나기 위해 준비해둔 장작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는데, 늘 준비만 하시고 정작 당신들은 아까워 쌓아 두기만 했던 마른 장작들을 오늘 저녁 우리가 그냥 가져다 때려고 하니 일말의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채 사장은 많이 해본 솜씨로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더운 물도 준비하고 방에 군불을 지펴서 따뜻한 온돌에서 자야 하기 때문인데, 오랫동안 비워 놓은 아궁이는 작고 낮은 구조라 그런지 생각처럼 그렇게 불이 잘 드리지 않아 부엌, 방안과 마루 등 온 집안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새어나와 모두들 눈물을 머금고 각자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했다.
구멍이 있는 곳마다 연기가 어찌나 많이 새나오는지 우리 모두 온 몸이 훈제燻製가 될 것 같아서 조금은 괴로웠지만, 채 사장은 꼼짝 않고 아궁이 앞에 편한 자세로 앉아 아궁이 불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나야 옛날 생나무로 쇠죽 끓여주던 때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렸던 생각이 많이 나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참으려고 해도 자꾸만 매운 연기에 눈물이 나와 이리 저리 옮겨 다니며 쩔쩔매고 있는 데, 군불담당인 채 사장이 생뚝맞게 고구마를 구워 놨다고 하면서 불러 모으더니 불 아궁이에서 겉이 시커멓게 탄 군고구마를 부지깽이로 툭툭 털어 꺼내 놓는다.
모두 의아해서 “아니 이 상황에서 웬 고구마냐?”고 했더니 총무인 박 여사가 준비해왔다는 것이다. 사과나 단감, 각종 푸성귀나 소소한 양념까지 야외 생활용품을 거의 빠짐없이 준비해왔음에도 고구마까지 챙겨왔으니 또 한 번 예상외의 준비성에 모두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삼치고기가 워낙 큰 놈이라 거짓말 조금 보태 도마 가득 회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먹을 생각도 않고 적당히 구워져 있는 군고구마 하나씩 들고 호호 불어가며 먹는 그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고구마의 품질도 최상품이었지만, 채 사장이 눈물을 머금고 적당히 익히도록 기술을 발휘해 구운 고구마, 그분이 즐겨 쓰는 말대로 ‘이 대목에서’ 그 기술을 칭찬해 주고 싶다.
이른 아침 아버지께서 쇠죽을 일찍 끓여 놓고 구워주시던 고구마를 잠결에 동생들과 아궁이 앞에 불려나와 쪼그리고 앉아 먹을 때 입술 언저리에 묻어 이상하게 그려진 검댕이 칠을 보고 서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맛있게 먹었다.
방안의 구들장에 온기가 올라 올 즈음, 마치 두부 모처럼 듬직 듬직하게 썬 삼치 회가 먹음직하게 신문지 위에 차려졌고, 빙 둘러 앉아 소주잔을 주고받으니 세상 누구보다도 더 행복한 분위기였다. 도심에서 맛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이 순간은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았다. 그야말로 “이대로!”였다. ‘귀양살이 체험’이라는 격은 맞지 않아도 그 핑계를 대고 잘 먹고 잘사는 이들이 섬 오지奧地에 놀러 와서 먹는 회 맛이 라니 과분하지만 이 맛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단지 이 작은 방 한 가득 모여 앉아 소주잔을 기우리는 분위기와 어우러지는 삼치 회의 진맛에 취하고 있는 바로 우리 회원들뿐일 것이다. 이 대목에서 건배가 빠질 수 없었다.
“분위기 좋고, 조-오타! 이대로! 짱!”
밥상 이야기가 나왔으니 박 총무가 얼마나 준비성이 있었는지 신문질 깔아 밥상 대용으로 할 것까지 생각해 준비물로 챙겨 왔다니 모두들 신무지 밥상에서 먹고 마시는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부분이 자연스럽게 ‘귀양살이 체험’의 한 부분 같이 제격에 맞는 밥상이 된 것이다.
나는 이 여행을 함께한 사람들 중 최고 연장자年長者로서 그냥 멀쑥이 앉아 있다 한 상 차려 놓은 주안상을 받으려니 미안하기도 해 익숙한 솜씨로 상차림의 진수를 보여줬던 심, 박 여사의 수고를 위해 박수로서 답례를 권했다.
고생 끝에 새로운 곳에서 마시는 소주 몇 잔에 취기가 오르니 집 주인인 서 감사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본인에게는 누가 되는 말인지 몰라도 우리가 뭣 모르고 체험해 보니 명절 같은 집안의 대소사 때나 부모님 생전에 당신들을 뵙기 위해 험한 뱃길을 무릅쓰고 드나들었을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그에겐 귀양살이나 다름없었을 애환哀歡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심성心性으로 볼 때 유년 시절 친구들과 함께 바닷가를 놀이터 삼아 마음껏 뛰 놀며 순진하게 보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큰 뜻을 품고 육지로 나와 공부한 것만으로도 우리가 볼 땐 성공한 셈이니 한 마디로 말해 정말 출세한 분 중 한 사람이라는 것에 회원들 모두는 공감하며 이야길 할 때마다 정작 당사자는 그저 웃기만 했다. 이제 오늘의 대미大尾를 장식해야만 했다.
배부르고 등 따시니 무엇이 부러우랴? 잠잘 시간대가 되니 조금 전에 눈물까지 흘려가며 땐 군불의 효력이 등에 오롯이 전달돼 시골 구들장의 따스함이 직접 전해왔는데, 따뜻한 아랫목을 서로 차지하려고 형제들과 다투며 지냈던 내 어릴 적의 고향생각이 났다.
내일 제주도 관광을 위해 잠을 자야 할 시간이었지만 달성 서 씨 가문에 전해오는 노비奴婢 문서가 있다고 해서 서 감사로부터 설명을 들었는데, 그 내용인즉 노비로 들어 온 18세의 청년을 여럿이 공증公證하는 문서의 형태로 되어 있어서 우리 모두는 처음 보는 귀한 사료가 될 옛 문서에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었다.
내 짐작으로 서 씨 가문의 선조 누가 어떤 사연으로 이 오지의 외딴 섬에 정착하고 살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섬 특성 상 경작할 농경지도 변변찮은데, 노비를 두고 사셨다는 것이 이해가지 않는 일이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양반의 체통을 유지하며 사셨던 것만은 틀림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낡은 천장 속에서는 빈집으로 있을 때 이 집의 터줏대감격인 서생원 몇 마리가 우리가 왔다고 놀래서인지 아님 반기려고 하는 짓인지 모르겠으나 우당탕 거리며 소란을 피워대는 것까지 내 어릴 적 시골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소리가 울타리나무를 휙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내일은 제발 바다가 온순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 많은 인고忍苦의 세월을 호롱불에 불 밝혀 놓고 도란도란 이야길 하시다가 잠들었을 이런 외딴 섬에서 도시로 나간 아들을 생각하며 긴긴 겨울밤을 외롭게 지새웠을 옛 주인의 체취體臭가 묻어나는 방에 누워 옛날을 회상하니 마치 귀양살이 와 처음 자는 것이 이런 기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잠이 들었다.
피곤했던지 밤새 불어 대는 코고는 소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방으로 나뉘어 뜨끈한 구들장에서 몸을 굽고 아침에 일어나니 도시의 찜질방에서 지낸 몸뚱이와는 그 질이 확연하게 달랐다. 몸이 가볍고 개운했다.
서 감사가 혹시라도 회원들이 불편해 할까봐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면서 우리들을 위해 애써준 보람으로 공기 좋고 등 따신 곳에서의 1박은 만족도로만 볼 때 일류 고가의 호텔방에서 지낸 것 보다는 더 값지고 의미가 있었다.
이곳에서 원래는 2박을 하려 계획했으나 나머지 일정은 제주에서 관광을 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기 때문에 아쉽지만 이제는 온 길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여장旅裝을 챙겨 놓고 삼치 지리로 끓인 아침을 먹었는데, 그 고기가 얼마나 컸던지 아직도 일부가 남아서 도로 가져가야한다고 했다.
체험장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것으로 이곳에서의 아쉬운 일정을 모두 마무리해야 했다. 나는 만약을 위해 멀미약을 귀 뒤에다 붙이고 준비를 단단히 했다.
서 감사는 LPG가스통을 잠그고 시건장치 등을 비닐로 덮어 녹슬지 않도록 단단히 봉하는 것으로 문단속을 하며 집 밖을 한 바퀴 돌아 나왔다. 아마도 내 생각으로는 육지로 돌아가면 눈을 감아야 잘 보이는 고향집이 될 것이니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고 싶어서일 것이다.
우리들은 모노레일 카터에 짐을 실어 내려 보냈다.
바다를 내려다보았지만, 여전히 세찬 바람이 일고 있었다. 약간 겁먹은 표정을 짓자 모노레일을 몰고 나온 이장이 우릴 안심시킨다. 어제 들어올 때 파도는 파도가 아니라며 섬사람다운 말을 했다. 더 큰 파도에도 배가 다닌다며 아무 것도 아닌 걸 가지고 별 걱정 다한다는 눈치였다.
정기선이 없어 추자도에서 고기잡이배를 불러 떠나야 했지만, 마침 뭍에서 이 섬의 이장 댁에 낚시하러 오는 배가 있어서 연락해 두었다고 하며 낚시 배는 관용선에 비할 수 없이 커서 웬만한 파도에도 안전하다는 말로 우릴 안심시켰다.
파도가 조금은 줄어든 점도 있었지만, 이장의 말대로 이 배는 크기도 크고 속도도 빨라 우리 일행은 마음 편히 추자도로 돌아 나올 수 있었는데, 이 행사를 주관했던 서 감사도 그제야 마음 놓인다는 눈치였다.
귀양살이 해보겠다고 기대 반으로 겁 없이 찾아 갔던 섬 속의 섬, 횡간도. 떠나오며 다시 바라보니 나는 두 번 다시 못 찾아올 것에 대한 연민의 정 같은 것이 생겨나 자꾸만 눈길이 갔는데, 고향을 두고 떠나오는 서 감사의 마음이야 어찌 가슴이 먹먹하지 않았으랴?
안녕. 횡간도!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비록 하루 밤 머물다 떠나온 횡간도에서의 짧은 체험이었지만, 소중한 추억을 가슴에 담고 떠나온 셈이니 저마다 느끼는 마음은 만리장성을 쌓는 심정으로 다양한 장르의 문학 소재로 승화昇華될 것이 분명하다.
비록 오지에서 부대끼며 하룻밤 묵고 생활했다고 회원 간 서먹한 감정이 모두 사라져 오랫동안 가족처럼 지낸 사이 같이 훨씬 친숙한 분위기가 되었다.
회원 여러분들과 함께한 ‘귀양살이 체험’이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잠시 일탈逸脫했던 여행을 마치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 이 글을 정리하고 있으니 여러분들과 함께한 시간들이 벌써 소중하고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아 내 마음 어딘가에 추억으로 자리했음을 알게 되였습니다.
부제副題와 같이 비록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옛날의 그 ‘귀양살이 체험’은 아닐지라도 이런 여행을 통해서 얻은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돈독히 다지는 것은 물론 회원들 각자의 성향性向을 알 수 있어서 이를 계기로 우리 가산문학회가 좀 더 발전하기 위한 소중한 디딤돌이 됐으면 하는 점에서 이번 오지 섬 여행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큰마음으로 장소를 제공해준 서 감사와 내 일처럼 몸 안 사리고 함께해주신 정 회장과 회원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로 내 인사를 치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