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행자지自行自止의 행복론
◇ 자행자지自行自止의 행복론
<2014.3.6 주간인물지 인터뷰 내용을 중심으로>
“꼭 생업生業이랄 수도 없는 지금의 건축사업무를 욕심내지 않고 운영하면서 틈틈이 글을 써가며 문학동호인들과 소통하고 그리고 여유 있는 시간은 낚시를 취미로 하는 조락지우釣樂之友들과 함께 벗하며 취미생활을 하는 등 일상을 즐거운 마음으로 자행자지하면서 여생지락餘生之樂하는데서 행복을 찾고 싶다.”는 내용으로 인터뷰를 마쳤는데.........,” 2014.03.25
<2014.3.6 위클리 피플지 기자가 촬영한 필자의 모습....>
그러나 젊을 때, 한창 일할 나이엔 그렇게 살 수가 없다. 젊었을 때는 할 일을 하는 것이지 하고픈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종의 의무 같은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기본적인 핵심은 부모님 봉양과 자식들을 양육하는 일부터 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자녀들 교육이나 자신의 스펙을 쌓는 일, 남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느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있을 수 없다.
‘젊어 하는 고생은 돈 주고 사서도 한다.’는 말과 같이 고생스러워도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안하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기 싫어도 일해야 한다. 그래야 남 보기에도 좋아 보이고 자신에게도 성취욕 같은 것이 생기기 때문에 일에서 보람을 느끼며 살게 된다. 그런 삶을 정신없이 살다보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빠르게 세월이 흘러서 어느 정도 나일 먹고 여유가 생기게 되면 그렇게 살아 온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때부터는 정말 자신이 하고픈 것, 즐기면서 할 수 있는 것, 자신을 위해 여생을 즐기며 소일 할 수 있는 것을 찾거나 계발啓發하여 살지 않으면 은퇴 후의 삶이 지루하고 무의미해지기 때문에 삶이 건강해 질 수 없다. 인간은 일을 떠나면 갑자기 소외감을 느끼는 유일한 동물에 속한다. 옛 어른들의 말씀에 “늙어서도 뭔가 꿈적거려야 건강해진다.”고 말씀하시던 뜻은 적당한 소일꺼리 같은 일을 손에 놓지 않아야 건강해진다는 현대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요즘은 100세 장수를 스스럼없이 말하고 있는 시대이다. 정년은 빨라지고 이후 사는 기간이 늘어났으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당면한 숙제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에 대한 답으로 일은 곧 건강이니 일을 해야 장수할 수 있다고 필자는 감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세상을 내려다 볼 나이가 되면 일은 곧 짐이 되고 부담負擔이 되어서 일하기가 싫어지는 게 당연해진다. 그것은 신체적으로 체력도 떨어지고 정신적으로 의욕이나 추진력도 떨어지기 때문에 일로부터 멀리 하고픈 것이 나이 먹은 노인들이 겪는 가장 큰 핸디캡이다.
일로부터 소외되어서는 오래 살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감히 ‘나이가 들어서도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라.’는 말을 강조하고 거기서 건강과 행복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이 들어 하는 일도 자행자지自行自止하는 삶에서는 누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일이 없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오직 결정은 자신이 하고 본인이 책임지면 되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하고픈 일을 찾아 즐기면서 하기 때문에 삶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 없는 것이다.
지난 달 초 모 주간지 여기자로부터 뜬금없이 인터뷰 좀 하자는 제의가 왔다. 처음에는 무조건 그럴 시간도 없고 의향도 없다고 극구 사양했었지만 뭔 일로 나를 찾는지가 궁금하기도 했다. 사실 기자들은 어느 조직의 책임자 급만 되면 가능한 상대를 하지 않는 것이 상책 일만큼 껄끄러운 존재다.
기자들이나 경찰 같은 종사자들을 대할 때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 해서 가깝게도 대하지 말고 멀게도 두지 말라는 말이 연상되어 거부감이 먼저 들었다.
공직자 같은 약자들에게 이들은 갑이기 때문에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으로 억지를 부려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반길 턱이 없다. 그야말로 적당히 대하라는 말인데, 공직을 떠난 지도 어언 강산이 변할 만큼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런 감정이 드는 것은 아직 기자에 대한 그때의 안 좋았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야기나 들어보자며 약속한 시각이 되자 큼직한 카메라를 걸머지고 불쑥 사무실로 들어온 사람은 박○○라는 아리따운 아가씨였다. 주간인물, 위클리 피플Weekly People사 기자라며 명함을 건네며 자길 소개했다. “요즘은 한 가지 일이 아닌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행하는 이른바 ‘멀티 플레이어’들이 우리 곳곳에 많이 있다.”는데, 필자가 그런 인물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왔다는 것이다. 일단 취지가 마음에 들었다.
어떤 형식도 없이 그냥 소파에 맞대고 앉아 자연스럽게 세상사는 이야기 중에 나의 요즘 생활 전반. 즉 건축사建築士 본연의 직업관과 수필가로 등단하여 글을 쓰는 이야기, 그리고 남는 시간의 취미생활 등 약 한 시간 여를 두서없이 묻고 답하며 대화를 나눴다. 기자라고 하는 직업의식이 있어서인지 가끔 묻는 말이 날카롭긴 해도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과 미소를 머금은 대화를 하다 보니 필자도 즐거운 인터뷰가 되었었다.
“즐겁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은 한 마디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 이 대목에서 잠시 생각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한 세상을 각자도생各自圖生하면서 사는 것이 자신의 인생살이기 때문에 인생 사는데 정답이 없는 것이라고 전제한 후 나는 공직을 퇴임 후로 자행자지自行自止하며 살아가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현문우답賢問愚答처럼 말했다. 그건 사실 필자의 요즘생활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것이라고 꼬집어 말해줄 수도 없는 것이다. 누가 거저 주는 것도 아니고 돈이 있다고 어디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매 순간으로 느끼는 개인의 주관적 감정이다. 그러나 불행은 개인의 정도에 따라서 행복함보다는 더 자주 찾아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당하는 쪽에서는 길게 괴롭히기도 할 것이지만, 필자의 행복론의 핵심은 자행자지의 삶이라고 역설했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 꼭 생업生業이랄 수도 없는 지금의 건축사업무를 욕심내지 않고 운영하면서 틈틈이 글을 써가며 문학동호인들과 소통하고 그리고 여유 있는 시간은 낚시를 취미로 하는 조락지우釣樂之友들과 함께 벗하며 취미생활을 하는 등 일상을 즐거운 마음으로 자행자지하면서 여생지락餘生之樂하는데서 행복을 찾고 싶다.”는 내용으로 인터뷰를 마쳤는데, 필자의 개똥철학 같은 행복론을 읽은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누구나 행복에 대한 사유思惟의 차이를 인정해줬으면 하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