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수필,시

하늘나라로 간 친구, K를 추모하며

이원아 2018. 11. 27. 12:07


                                              ◇하늘나라로 간 친구, K를 추모하며……,



                            “전분세락轉糞世樂이라. ‘개똥밭에 뒹굴어도 이 세상이 즐겁다’고 했는데, 산 사람은 그래도 즐겨할 짓해야하니 울적한 마음으로 낚시터에 앉아 있는 내 옆에서 그가 이런 저런 말로 구시렁거리며 낚싯대 던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2018.10.25
                 
 

                        
   오늘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 받을 일이다.
   그것은 누군가 는 꺼져가는 생명줄을 붙잡고 오늘을 살기 위해 바동대다가 결국 어제로 생을 마감한 바로 그날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면에서는 과연 누가 살아있고 누가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살아 있지만 죽은 사람처럼 사람 구실을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어 없는 사람도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산자의 가슴에 남아 그로 인해 영향을 주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주관하는 그 어떤 절대자가 마음 내키는 대로,
  “너는 살아있고 너는 죽어.”라고 말할 때 바로 극명하게 구분되는 것일 뿐, 누구든 가볍게 대답할 수 없다.
  죽음이란 형상이 사라져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영생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죽고 사는 것에 관해 조급해 하지 않고 그냥 고민 없이 초연해하며 살아간다. 물리적으로 몸 하나만 가지고 죽은 자와 산자를 구분하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영의 세계로 가면 아무도 그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은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만 후세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거기엔 다른 삶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의 몸가짐이나 정신의 세계를 함부로 하지 않고 수련과 믿음으로 살다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하는 것이다.

  필자는 최근 삶과 죽음의 문턱을 몇 차례 넘나들다 결국 지난 10월 17일 오후, 세상을 버린 동갑나기 나의 절친 K의 죽음에 관한 생각으로 마음이 울적하다. 인명재천人命在天이요, 사생유명死生有命이라고 하늘의 뜻에 따라 생을 달리했지만 환절기 지인들의 부고가 잦은 요즘 특히 K의 죽음이 남다르다.
  절친의 부고이니 참으로 애석哀惜했다.
  그가 발병 후 병원에 드나들기를 여러 번, 그때마다 간병하는 가족이나 친구로서도 결국 몸도 마음도 피폐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안타까워했었는데, 그가 그만 생로병사의 운명에 따라 삶을 마감한 것이다.
  전생에 몇 겁劫의 인연이 있어야 친구로 만난다는 데, K는 필자와 75년부터 공직을 함께했음은 물론 40여년을 교분하며 낚시라는 하나의 취미로 연을 맺어 그야말로 뱃장이 맞는 복심지우腹心之友이자 절친한 조우釣友이기도 하다.
  이글을 쓰고 있는 때 한 카친으로부터 필자의 속마음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마침 카카오톡kakao talk으로 친구에 대해 구구절절한 내용의 글을 보내왔다.

『친구..........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때는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을 때이고, 세상에서 가장 울고 싶을 때는 친구가 내 곁을 떠날 때이다.
세상에서 가장 미워하고 싶을 때는 친구가 점점 변해 갈 때이고, 세상에서 가장 두려울 때는 친구가 갑자기 차가웠을 때이다.
또 세상에서 가장 웃고 싶을 때는 친구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때이고, 세상에서 가장 고마울 때는 친구가 나의 마음을 알아 줄 때이다.
또 세상에서 가장 편안할 때는 친구가 내 곁에 머물러 있을 때이다.
세상에서 가징 친근하게 느낄 때는 친구의 손을 잡고 마주 앉아 있을 때이고, 세상에서 가장 외롭다고 느껴질 때는 친구가 내 곁에 없다고 생각될 때이다.
세상에서 가장 바라고 싶은 것은 친구의 맘속에 내가 영원히 간직되는 것이다.』


  정말 그 친구와 생전부터 얼마 전 그를 떠나보낸 후 지금에 와 생각해보니 카톡의 내용들이 필자의 속마음을 잘 표현해 주는 것 같아 공감이 가면서 더욱 안타까워진다.
  필자가 그와의 관계에서 가장 행복했을 때는 그와 낚시터에 앉아 소주잔 기울이며 수변정담水邊情談을 할 때였다.
  유난히도 소주를 맛있게 마시던 친구 K, 특히 랜턴등불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밤낚시를 즐기는 때 직장이나 가족, 아이들 이야기 등 소소한 이야길 나누며 낚시질을 함께한 세월이 얼마이던가?
  찌톱이 정상보다 조금이라도 올라와 있게 채비를 하고 있으면 어김없이,
  “어이! 전봇대-찌가 마치 전봇대처럼 수면보다 우뚝 높게 올라와 있는 모습-내려라. 잉!”하는 등 낚시터에서의 농담이나 위트는 타의 흉내를 불허할 정도로 풍부해서 이런 소릴 들을 때마다 미소로 답하며 행복감으로 가득했었다.
  그의 별명은 <저수지 내비게이터>였다.
  저수지 이름만 대면 K가 가는 길서부터 포인트까지를 휑하니 꿰뚫고 일러 준다 해서 우리가 붙여준 별명이다.
  지금은 자동차에 내비게이터가 길 안내를 하지만 그것이 없을 때에도 출조시 길 잘 몰라 불편해 할 필요가 없었다.
  그만큼 프로기질이 있던 진정한 낚시꾼이기도 했다.
  100세 세대라고 하는데, 인생의 참맛을 즐기면서 좀 더 살아도 되는 나이에 세상 버리고 먼저 훌쩍 떠나갔으니 울고 싶은 심정으로 벌서부터 그가 그리워진다.
  누가 내 가슴속에 그의 목소리로 행복감을 채워 줄까?
  참으로 아쉽고 안타까우며 서운한 일이다.
  전분세락轉糞世樂이라. ‘개똥밭에 뒹굴어도 이 세상이 즐겁다’고 했는데, 산 사람은 그래도 즐겨할 짓해야 하니 울적한 마음으로 낚시터에 앉아 있는 내 옆에서 그가 이런 저런 말로 구시렁거리며 낚싯대 던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제 다시 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일이지만 그와 교분하면서 낚시를 함께했던 그 많은 날들이 새록새록 생각났다.
  취미생활로 경상권, 전라권의 강과 저수질 누비며 그와 함께한 낚시질이 40여 년이나 되니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낚시터에 묻혀 있을까를 생각해 보라.
  앞으로 아마 그와 함께했던 낚시터를 갈 때마다 여러 생각들이 회상되면서 옛날 함께했던 추억들이 주마간산走馬看山처럼 줄줄이 눈에 보이듯 생각날 것이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 후 며칠이 지났다.
  날씨마저 스산한 한 가을, 낚시터에 앉아있으니 저 세상 간 사람은 그렇다 치고라도 산 사람도 그저 가슴속만 먹먹해 진다.
  일찍이 여읜 부모님을 떠나보냈을 때에는 이런 감정이 아니었던 것 같다.
  부모는 당연히 연세 드셔서 떠나 가셨으니 하는 일종의 순서 개념이었지만, 친구를 곁에서 떠나보내는 마음은 나도 죽음이 바로 코앞에서 어른거린다는 뜬금없는 생각이 든다.
  받을 수는 없지만 보낼 수는 있는 것이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멀리 떨어져 있어야 생기는 감정이다.
  이제 그가 멀리 가고 없는 낚시터에 앉아 있어도 보고 싶을 때마다 그리움만 더해 질 것이다.
  친구야, 병석에 누워서도 함께했던 낚시이야기로 화제를 끄집어 낼 정도로 우리에게 평생의 취미를 함께했었지.
  친구는 하늘에 가 없고 나는 살아 오늘도 붕어가 날 원망하던 말든 손맛을 즐기려 낚시터에 앉아 입질을 고대하고 있는 데도 머릿속엔 솔솔 그리움만 쌓여 든다.
  누구나 예외 없이 꼭 한 번 가야할 인생의 종착역, 황천길!
  누가 먼저 가느냐가 관건이라지만, 이승에서 먼저 간 친구 K가 그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앞으로도 K가 없는 낚시터가 스산한 가을바람 지나간 자리처럼 쓸쓸하겠지?
  세상 버리기 한 주 전쯤 문병 가 이야길 나눌 때.
  친구야, 차마 잘 가라는 말이 입에 떨어지지 않아 중환자실 문을 나서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만 가슴에 담고 멍하니 서 있다가 돌아왔어.
  산자가 죽은 자에게 전하는 인사말이 맞는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이제는,
  “잘 가”라는 말을 전할께.
  그곳에선 아프지 말고 투병하느라 좋아하던 낚시질도 한 동안 못했으니 이젠 실컷 하면서 영생을 누리길 바랄게.
  아마 우리들도 많이 그리워할 거야.
  편치 않은 울적한 내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는 듯 때맞추어 입질이 들어왔다.
  “이제 너무 상심 말고 산 사람의 작은 행복부터 누리라.”는 듯 덩치 큰 붕어가 낚여 앙탈 대며 끌려오는 순간, 모든 잡념은 사라지고 스쳐가는 단상斷想도 함께 멈춘다.
  잊을 수는 없지만 지울 수는 있는 것이 슬픔이라고 했다.
  마냥 슬퍼만 할 수도 없는 것이 산사람의 입장이니 그가 없는 빈자릴 그리워하며 낚싯대를 다시 던진다.

 

 K를 추석追惜하며, 삼가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