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수필,시

◇ 나는 영원한 중생이고 싶다.

이원아 2010. 9. 7. 10:53

◇ 나는 영원한 중생이고 싶다.

 

 

 

                  어제의 잘 못된 것들이 오늘에는 그것이 참 일 수도 있게 변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역사를 배우는 것이며 잘 못된 사실들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오늘의 삶에 있어서 두 번 다시 전철前轍을 밟지 않도록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2010.08.25

 

 

 

“나무관세암보살”

 “나무관세암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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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경金剛經을 수 년 째 공부하고 있는 어느 스님 한 분이 법당法堂에 앉아 열심히 기돌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침 또 다른 스님 한 분이 이 법당을 지나다 이상하게 들리는 염불소리를 듣게 되었다.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더욱 신경 써서 듣고 또 들어봐도 역시 자기가 아는 배움으로는 ‘나무관세보살’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은데, ‘나무관세보살’이라고 계속 염불하고 있는 것 같이 들려서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알아보려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서로 목례를 하고 이야길 나누게 되었다.

 “스님! 가만히 듣고 있자니 스님은 왜 ‘관세보살’이라고 염불하십니까? ‘관세보살’이 맞는 것 아닌가요? 무슨 다른 뜻이 있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아닐 세. 관세보살이 맞다네.”

 “아닙니다. 관세보살입니다. 스님”

 “관세보살이 맞다카니까.”하며 ‘암’ 자에다 특히 힘을 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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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당 뜰 위에 서서 두 사람의 옳고 그름이 끝일 줄 모르고 설전舌戰으로 이어지자 중재안이 나왔다.

 “우리 서로 다투지 말고 내일 아침 큰스님께 여쭤봐서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도록 하자.”고 합의를 보고 헤어졌다. 관세암보살을 주장하던 스님이 덜컥 걱정이 되었다.

 자신도 관세음보살이 맞다는 걸 알고 있지만, 염불을 외다보면 그것이 발음이 잘 안되어 자꾸 관세암보살로 발음된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이미 약속한 터라 슬쩍 걱정이 되어 한 꾀를 냈다.

평소 좋아하시는 호박범벅을 잘 끓여 들고 큰 스님 방을 찾아 사실대로 이야기 하고는 “내일 아침에 꼭 ‘나무관세암보살’이 맞는다고 해 주십시오.” 출출한 김에 호박죽 한 그릇을 잘 먹은 큰 스님이 미소를 지으며 “그러마.”하는 대답을 듣고는 돌아왔다.

 관세음보살이 옳다는 스님도 워낙 강력하게 관세암보살이 맞는다고 주장하시는 승력僧歷 많은 분의 말인지라 자신이 틀릴 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에 또 걱정이 되어 큰 스님이 평소 좋아하시는 국수를 끓여 들고 가서는 이렇고 저렇고 해서 “내일 아침에 뵈러 올 테니 꼭 관세음보살이 맞는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역시 같은 대답을 듣고 돌아와 잠을 청했다.

 아침이 되어 큰 스님 방을 찾아가자, 큰 스님께서 두 수도승修道僧을 앉혀 놓고는 의외의 말을 했다.

“이보게 들. 관세보살이면 어떻고 관세보살이면 어떠한가? 내가 볼 때는 그 본질은 아무 것도 변함이 없는 무의 개념이라 관세암보살도 관세음보살도 아니란 말일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마시게. 어제 저녁 나에게 뇌물로 준 호박죽이나 국수는 잘 먹었느니라. 그러나 그것을 얻어먹었다고 해서 하나를 택해 옳다고 말한다면 그 자체가 불법佛法이 아니니라. 진실도 진실에 집착하지 말고 진실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불법의 본질이며 그걸 깨닫는 일이 참다운 수도자의 길임을 명심해서 정진하도록 하시오.”

 두 스님은 방망이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으로 큰스님 방문을 나섰으나 수 십 년을 기도드려 공부한 보람을 이제야 알게 된 것 같다는 참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위의 이야기는 현 중앙승가대 명예교수이신 종범 큰스님께서 금강경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쉽도록 예를 들어 설명하는 자리에서 들은 강론講論 내용을 간추린 이야기이다.

 금강경은 근본적으로 무엇에 집착하지 말고 버림으로서 공空의 경지로 무소유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공은 비어 있는 허공虛空과 같은 것이니 거기에 무엇을 얹어 놓거나 걸어 놓거나 기대 둘 수 없는 아무 것도 없는 곳이라 소유의 개념도 없는 불교가 지양하는 최고의 경지이다.

 그러니 심지어 버리려고 하는 그 마음까지도 결국 버려야 한다는 것이 이 경의 본질인데, 그 스님의 가르침은 중생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파격적이었다.

 일례로 중생들이 법당에 나와 부처님께 기도하면 무엇을 얻어 갈 것이라는 생각으로 기도한다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며, 기도의 상대가 부처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엔 부처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 하나 한 곳에 집착하다 보면 다른 한 쪽을 잃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은 둘 다 잃게 된다는 것인데, 그럼 무엇을 믿으라는 것인지 도대체가 불식佛識이 없는 나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라 가슴만 답답할 뿐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끝없는 시행착오를 일으키면서 산다고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나니 젊은 시절 그것이 인생의 목표처럼 여기 던 것들이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데, 사람의 영적인 사고思考가 평생을 두고 변하면서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어서 가치價値의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이리라.

 어제의 잘 못된 것들이 오늘에는 그것이 참 일 수도 있게 변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역사를 배우는 것이며 잘 못된 사실들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오늘의 삶에 있어서 두 번 다시 전철前轍을 밟지 않도록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도 못하면서 오늘 그것이 옳다고만 주장한다면 음지전양지변陰地轉陽地變과 같이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 되는 순리를 모르는 사람이며 그래서 내일은 또 다르게 시비가 일 것이니 돈, 명예, 권력은 물론 사고까지도 한 곳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요즈음 세종시 문제가 국력의 낭비를 초래하고 당초 안대로 돌아가 잠잠하더니, 4대강 사업을 방해하는 무슨 환경단체 간부들이 보 축조현장을 수일 째 점거, 농성을 하고 있어서 공사의 진척에 많은 차질이 예상되고 있는 모양이다. 공정상 많은 진척이 있어서 중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다고 중단할 정부도 아닐 건데 극단적인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무엇 하는 사람들인지 이해가 안 된다.   대안代案도 없으면서 국책사업을 무조건 방해만 해야 할 일이며, 누구에게 그 폐해가 돌아올 것인가?

 사업의 본질이 잘 못되었다면 다음 정권에서 표로서 심판해도 늦지 않을 것이고, 준공 후 결과가 곧바로 눈에 보일 때 보완해도 될 일을, 당장 어떻게 하라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무리들은 그 강물을 안 먹고 사는 사람들인가? 너무 한 쪽에 집착하는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언젠가 말했듯이 집착은 편견偏見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고思考가 들어 갈 틈을 내 주지 않는데서 문제가 야기된다.

 우리 사회는 자기 고집을 굽히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남의 이야기를 다 들어 보지도 않고 자기주장만을 고집하려 들기 때문에 대화는 물론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 고집불통 소릴 듣는 것이다. 부처님도 바로 이런 점을 금강경金剛經을 통해 중생들을 계도啓導하였던 것이다. 관세암이던 관세음이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본질은 변하지 않는데 자기가 옳다고 집착하는 데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갈등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TV앞에 앉아 법문강의를 시청하며 쉽지만은 않은 구도자의 길을 생각하니 바로 나와 같이 사는 인생 이 가장 보편적인 삶이 아닌가를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스님들도 인간인데, 사람으로 태어나 범생凡生들의 진미를 알지도 못한 채 깨달음을 얻으면 무엇 하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부처에 귀의歸意한다고 한들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인가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수도자들이 깨달음의 경지에 오를 때까지 그 많은 고행苦行을 감내하여야 하고, 자신에 대해 한 순간도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고 끝없는 자기 성찰을 해야 하는 그 어려운 길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직이라 했던가?

그래서 나는 그냥 쉽게 결론을 내렸다.

‘나같이 사파裟婆에 사는 보통의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이도 저도 집착하지 않는 그래서 ‘나는 영원한 중생衆生이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