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 앞에 장사 없다.
◇ 세월 앞에 장사 없다.
“노랫말대로 ‘뜬구름 쫒아가다 돌아 봤더니 어느새 흘러간 청춘’이라지만, 돌아오지 않는 청춘이라면 늙어간다는 것을 인정하고 거기에 걸맞게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면서 후대後代들이 열심히 사는 것을 보고 인생지도를 잘해서 그들에게 사표師表가 될 수 있도록 할 의무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길흉사 챙기랴 취미 생활하랴 올 한 해도 그럭저럭 지나간다. 늙음을 감지하는 속도는 나이별로 다르다고 한다. 누가 그랬 나? 자신의 나이는 자동차의 속도계와 같은 거라고. 내 나이 64세이니 시속 64Km 속도로 인생행로人生行路를 달리고 있다는 말일 게다. 정말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을 요즈음 부쩍 하게 된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 내에 조경수造景樹로 심어 논 감나무가 몇 그루 서 있어서 어릴 적의 감나무를 연상하면서 지나곤 하는데, 언젠가 출근길에 처다 보니 지난 밤비를 맞아서 그런지 이파리가 대부분 떨어져 앙상한 가지가 두드러지게 보였다.
올 한 해 뭘 하면서 지났는지 단풍구경 산행도 한 번 못하고 훌쩍 겨울을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 부질없는 세월이 금세 지나갔다는 씁쓸함에 한 쪽 가슴이 허전해 지면서 뭔가 채워지지 않은 휑함이 다가오는 느낌이다. 내게도 갱년기가 왔는가?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니 언제일지 모르겠으나 나도 저 나무 끝에 매달려 바람에 나부끼는 마지막 잎새처럼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떨어질 것이 분명한데, 별 일도 없는 사무실에 출근길이라며 무리 속에 끼어들기 반복하고 있는 내 어깨가 일찍 찾아 온 겨울 날씨만큼이나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전에 없이 추위나 더위를 탄다거나 무력해 지는 것을 보면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로 위안慰安하면서 모든 걸 나이 탓으로 돌리거나 늘 다니던 산책로 오르막길이 전과 같지 않음을 느낄 때도 내가 이제 나이가 들었음을 자각하면서 무력함이 나이 탓이라고 자조하는 말로 하기도 하는 것이다.
“세월아 너는 어찌 돌아보지도 않느냐?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 어느 가수의 절절한 노랫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흘러간 그 세월이 어제 같은데......, 청춘을 돌려 달라고 애원해 봐야 가는 세월 막을 수는 없지 않느냐?” 참 애처롭기까지 하다. 돌아오지 않을 청춘이라면 노래로라도 그 한을 풀려고 하는 절규 같은 노랫말이 우리 민족의 정서와 딱 맞아 이런 류의 노래가 많은 사람들에게 불리는 것 같다. 그러나 늘 말하지만 만사분이정萬事分已定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대로 세월 따라 살다가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하느님도, 아버지도, 아내나 친구 그 누구에게 어떻게 해 달랄 수도 없는 것이고 발버둥 쳐봐야 돌봐 줄 아무도 없는 것이다. 물론 함께 할 수도 없는 것이 자기의 운명이다.
세월부대인歲月不待人이니 자연의 섭리대로 그냥 흘러 보내면서 한 세상 살다가 죽는 것은 이미 정해진 순리가 아니겠는가? 예부터 백구과극白駒過隙라 했다. 문틈으로 얼핏 지나가는 하얀 말을 보듯 세월의 빠름을 탄한 말이다. 세월이 빠르게만 느껴지는 것은 순전히 주관적이다. 어떤 사람은 흐르는 물에, 어떤 사람은 흰 머리카락을 뽑아내며, 어떤 사람은 시위 떠난 화살에 비유하기도 했고 문틈으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릴 듣고도 한 시절이 흘러감을 노래하기도 했지만, 느끼는 정도에 따라 각각 자신의 주관대로 다르게 적응하면서 사는 것을 보면 원래 주어진 운명하고는 별개의 문제인 것 같다.
세월은 무쇠도 녹슬어 못 쓰게 하고 단단한 바위도 변형시키며 결국 모래알로 만드는 위력이 있다. 누구나 지나 온 세월을 한 번 되돌아보라. 어느 날 거울 속에 늙어가는 자신을 보고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은 모습에 깜작 놀라기도 하고, 나이가 들면서 사진을 잘 찍지 않으려는 속성은 사진 속의 얼굴이 자기 생각보다 더 늙게 보이기 때문이라는데, 그가 바로 남이 아닌 자신의 참 얼굴임을 빨리 인정해야 한다.
세월은 미녀라고 그냥 놔 둘리 없다. 가는 세월 앞에 금세 노파老婆가 되어 추녀醜女로 만들어 버린다. 새 차 샀다고 시승해 보라며 뽐내던 친구의 차도 어느 새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고물이 돼 새 차로 다시 옮겨 타야 한다고 투덜댄다. 너는 안 늙고 어디 차만 늙었냐?
마을 초입에 우뚝 서서 고향을 지키던 수호목守護木, 아름드리 둥구나무도 늙고 병들어 흉물로 변한 모습을 볼 때마다 그 나무 밑에서 세상물정 모르고 뛰 놀며 자라던 유년 시절이 그리워지는 데, 그 나무만 늙었겠나? 한 여름 그 나무 밑에서 피서하시던 어른들은 다 돌아가시고 휑하니 찬바람만 불어 가는 세월 앞에 무엇이 남아 있을까?
이렇게 누구나 예외 없이 늙어간다는 것은 신이 내린 가장 보편적 변화의 과정이다. 그래야 공정한 것이 아니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그냥 그대로 있는 것 같지만 세월 따라 돌고 돌며 그냥 그대로 있지 않고 변하는 것에서 인생이 무상함을 불교에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권력도 오래가지 못한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한 시절 권력을 쥐락펴락하면서 세상을 우습게보고 살다 간 권자權者들을 보라. 10년은커녕 자기 명대로 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지 않던가?
며칠 전 딸아이 시아버지 칠순만찬에 초대되었다.
요즈음 해운대가 내가 아는 그 곳이 아닐 정도로 많이 개발되어 변해 있어서 길 찾느라 고생을 하고 겨우 식당을 찾아 자리를 하고 나니 사돈은 “잔치를 하지 말고 간단히 식구끼리 저녁이나 먹자.”고 했단다.
“아직은 사회활동도 하고 건강도 좋으니 팔순잔치나 거나하게 치러 달라.”고 아이들에게 이야기 했다면서 아직까지 자신의 건강함을 강조하더니 불쑥 하는 소리가 “사돈! 벌써 손들이 셋이나 생겨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며느리가 참으로 기특하다.”면서 내 딸 자랑을 연신 해댄다. 나한테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인지 모르겠으나 아닌 게 아니라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자리였다. 아이들은 누가 친 할아버지고 누가 외할머니인지 분간 못하고 그저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안기며 재롱을 떠는데 정신이 없었지만 마냥 행복해 하는 것 같았다.
부산을 떨며 철없이 이곳저곳 쏘다니던 어린 조무래기들이 생일케이크 앞에 서서 고사리 손을 잡고 춤을 춰가며 축가祝歌를 부르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내 생일은 아니지만, 가슴 찡하게 느끼는 행복감이 가슴 깊이 저려 오면서도 훌쩍 자란 외손들을 보면서 세월이 그새 많이 흘러갔음을 또한 인정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래 내가 뭐라 했나? 식구수를 늘리는 것이 행복의 중요한 요건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이런 경우에도 자효쌍친락子孝雙親樂이다. 자식은 아이를 낳아 그 재롱을 보는 부모에게 즐거움으로 효도하는 것이니 할 수만 있다면, 능력만 있다면, 식구수를 늘려 부모님을 즐겁게 해 드려야 세월 가는지 모르고 행복하게 늙어 간다는 것을 자식들은 알아야 한다.
만찬이 끝나고 손을 내밀며 “안녕히 가세요. 사돈! 사돈도 칠순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하면서 누가 물어 본 것처럼 세월이 빨리 감을 이야기 하는 걸로 보아 칠순을 맞는 생일이 결코 행복하지만은 아닌 듯 했지만 어쩔 것이랴? 흘러가는 세월 따라 그냥 살아야지.
내 앞에서 “할아버지! 안녕히 가세요.”하고 쪼르르 달려와 작별 인사를 해대는 외손들이 귀엽기만 한 걸 보니 사돈의 그 말이 나에게도 어김없이 많은 세월이 지나갔음에 만감萬感이 스친다.
내 자식은 귀여운지 모르게 키운 것 같은데, 손들의 재롱은 끝없이 사랑스럽다. 자연스럽게 인생의 배턴을 터치 하며 세대가 교체된다는 것은 섭리이며 행복한 일 아닌가? 노랫말대로 ‘뜬구름 쫒아가다 돌아 봤더니 어느새 흘러간 청춘’이라지만, 돌아오지 않는 청춘이라면 늙어간다는 것을 인정하고 거기에 걸맞게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면서 후대後代들이 열심히 살도록 인생지도를 잘해서 그들에게 사표師表가 될 수 있도록 할 의무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제 할 일 다 하고 떨어진 낙엽들이 가로街路 가득 휘날리는 때 출근 길 애잔하게 흐르는 배호의 ‘마지막 잎새’ 노래를 볼륨을 높여 듣고 있으려니 되지 않는 시상이 떠오른다.
세월아 네월아! 너 혼자 가거라.
네 힘에 겨워 내 딸려 가는구나.
나만 홀로 두고 가면 서럽겠지만
함께 가면 벗이 되려니,
지나 온 정 그리워도 다시 못을 청춘이네.
세월아 네월아! 너 혼자 가거라.
너 이기는 장사 없어 내 혼자 늙어가니
세월, 너도 늙어 함께 가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