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용信用을 목숨처럼
신용信用을 목숨처럼
※ 내용 중 시차가 있음을 양해바람.
“이해관계에 더 신경 쓰며 살아가는 요즈음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믿음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하여 어느 곳에서나 요구되는 사회적 덕목德目 중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을 열고 교감하는 가운데 신의는 두터워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
약 400여 년 전. 네덜란드의 어떤 선장이 24시간 낮이 지속되는 ‘백야현상白夜現象’으로 얼지 않는 바다에서 아시아로 가는 최단항로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10여 명의 선원들과 함께 북극해로 항해 도중 그만 예상치 못한 빙하氷河 속에 갇히게 되었다. 오도 가도 못한 채 닻을 내리고 영하 40도의 얼음덩어리 위에 움막집을 짓고 고립孤立된 생활이 계속되자 비축해 간 식량과 물이 고갈되었다. 그러자 북극 물개나 곰과 같은 동물을 잡아 연명하는 사이 선원 몇 명이 죽고, 배를 띄운지 일 주일 정도 지나자 혹독한 추위에 쇠약해진 선장船長마저도 급기야는 목숨을 잃게 되었다.
출항 후 50여 일이 지난 뒤, 다행이도 때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러시아 상선商船에 의해 12명만이 구조되어 네덜란드에 돌아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감동했다. 혹독한 추위에 떨고, 괴혈병과 굶주림에 목숨까지 위태로운 극한상황임에도 고객들이 위탁한 옷과 식량, 의약품 등 화물貨物들은 단 하나도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자신들의 목숨 못지않게 상도商道를 중요시 한 선원들의 이야기가 유럽 전역에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네덜란드 상인들은 상거래에 있어서만큼은 신용信用을 목숨처럼 여긴다는 것으로 인해 해상무역을 독점하게 돼 오늘날 네덜란드의 국부國富를 가져 온 단초端初가 되었다는 것이다.
신의信義란 믿음과 의리로 심지心志가 깊어 의심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인데, 주역周易에서는 신급돈어信及豚魚라는 말이 나온다. 돼지나 물고기 같은 미물조차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돼지라는 동물은 비대하며 체질이 강하지만 활동이 느린 것은 물론 미련하고 욕심이 많아 미련한 사람이나 몹시 뚱뚱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며, 어魚는 물고기의 총칭이다.
따라서 이 말은 땅과 물에 사는 이런 변변치 못한 미물微物조차 의심치 않는 신의가 지극함을 일컫는다는 말이다.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는 말도 있다.
춘추시대 노魯나라에 미생尾生(일명 미생고尾生高)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는 사람으로 유명했다한다. 오죽했으면 오늘 날까지 개인의 이름으로 오랜 세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신의의 대명사로까지 전해지고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어느 날, 미생은 애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는 정시定時에 약속 장소에 나갔으나 웬일인지 그의 애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계속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져 개울물이 순식간에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생은 약속 장소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가 결국 교각橋脚을 끌어안은 채 그만 익사하고 말았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약속을 해 놓고 안 지킨 애인이 나쁜 여자인지 미생이 고지식했는지는 불사하고, 이 두 이야기를 읽어보면 둘 다 너무 우직愚直했다는 공통점은 있으나 내용을 가만히 음미해 보면 결과 면에서는 서로 다른 의미의 ‘믿음(信)’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고객이 맡긴 탁송託送 물건 속에 든 것을 함께 나누어 먹었더라면 몇 선원들의 목숨을 더 건질 수도 있었겠지만, 고객과의 약속을 하늘같이 여기고 목숨을 걸고 그걸 지켜낸 것이 불특정 다수인들과 하는 믿음. 즉, 신용信用이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상도가 있음을 알 수 있지만, 후자인 미생의 믿음은 좀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미생의 그런 행동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말들이 있어 해석이 분분했지만, 변통을 모르는 미생과 같은 사람을 쓸데없는 명목에 구애되어 소중한 목숨을 소홀히 하는 인간은 진정한 삶의 길을 모르는 놈이다."라고 장자는 그를 혹평하기도 했다.
후자는 이렇듯 지극히 사적私的으로 약속을 굳게 지킨다는 뜻의 신의도 있지만, 오히려 오늘날은 고지식하여 융통성이 없음을 비유하기도 하는 말이다.
우리나라 대표 팀과 나이지리아와 월드컵 16강 경기가 있었던 6월 23일 새벽. 대학생 선․후배 넷이서 한강 물에 몸을 던져 16강 확정 축하 세리머니를 하다가 그 중 한 명이 결국 익사했다는 뉴스를 듣게 되었다. 세상에 하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별의별 뉴스가 있어 세간의 관심을 끌기도 하지만, 아무리 기쁘다고 그런 무모한 짓거리를 하여야 하는 지를 젊은이들에게 묻고 싶다.
세상사는 일이 아무리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고 자기 혼자 자기 멋대로 산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결코 그런 것만이 아니다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즉, 천하불여의天下不如意다. 즉, 내 몸은 내 것이지만, 대부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세상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의는 아니겠지만, 창졸지간倉卒之間에 친구를 잃은 나머지 사람들은 무모한 짓거리를 함께 한 것만으로도 후회하며 벗을 잃은 슬픔과 자책감에 오랫동안 마음의 업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부담이 생긴 셈이고, 그는 그를 낳아 길러준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는 형국이 되었으니 부모형제들의 비통함이야 아마도 붕천지통崩天之痛하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또한 사회는 그가 훌륭히 성장해 가면서 행복을 누리며 사는 동안, 직․간접적으로 나름대로의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믿고 있을 것인데, 한 순간의 무모한 죽음으로 인해 여러 관계로 사회와 맺어진 일종의 눈에 안 보이는 ‘사회적 신의’를 한꺼번에 저버린 셈이 되어 참으로 의롭지 못한 죽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TV의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보니까 어느 호젓한 산간 선사禪寺에서 수행하는 스님 한 분과 날 짐승인 새가 교감交感하면서 스님의 손바닥에 있는 먹이를 거리낌 없이 취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는 스님이 새를 절대로 해하지 않겠다는 청정심淸淨心이 새에게 믿음을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사람과 미물 간에 아무나 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
또 사람을 최고의 경계대상으로 여기며 근근이 살고 있는 야생 동물들이 항상 먹이를 주는 같은 시간대에 내려와 거리낌 없이 먹일 배불리 취하고 만족한 기분으로 제 삶터로 돌아가는 경우를 보았다.
그런 행동이 동물들의 끝없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자연법칙에 옳고 그름을 떠나 주인 없는 떠돌이 고양이도 그런 경우가 있고 야생의 멧돼지나 노루, 너구리 등의 경우도 있다. 모두 쌍방 간의 신의에 대한 좋은 예이다.
신의에 대해선 옛 선각자先覺者들의 이야기가 많은 실례實例를 통해 글이나 구전口傳으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후대를 가르치고 있지만, 또한 실천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것은 우리 사는 현대사회가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어서 사고思考의 폭이 어느 한 사상으로 통제가 불가능 한 점이 있더라도 이해관계에 더 신경 쓰며 살아가는 요즈음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믿음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하여 어느 곳에서나 요구되는 사회적 덕목德目 중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을 열고 교감하는 가운데 신의는 두터워지고 그 신의를 바탕으로 사는 우리 사회는 인간미와 정이 넘치는 삶의 터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