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수필,시

◇ 그는 그곳에 남아있다.

이원아 2012. 12. 17. 11:15

 

 

 

◇ 그는 그곳에 남아있다.

 

 

 

 

 

 

              “죽은 자는 거기 하늘공원에 남아 있고 산 나는 그곳을 떠나온 차이로 산자와 죽은 자의 극명한 갈림길에 서서 생각나는 것은 ‘인생처럼 허무한 삶이 없다.’는 것이었다.”                                                                              2012.12.15

 

 

 

 

 

  12월 8일, 토요일 부산의 기온이 예년의 유례類例없이 영하로 내려간 매우 추운 날씨가 계속되는 즈음이다.

  “헹님, 낚수?”

  본인은 낚시터에 와있으니 나보고 낚시하러 빨리 오라는 옛 직장의 후배 낚시꾼 L의 문자메시지였다. 이 후배는 사실 낚시도 좋아하지만 그것보다는 낚시터 분위기에 취해 마시는 소주를 더 즐겨 마시는 꾼이다. 날씨가 너무 추어 내일 낮에 잠깐 짬 낚시나 갈까하면서 토요일 출조出釣를 망설이고 있는데, 후배로부터 입질이 온 것이다. “저녁에는 못 가고 내일 아침 일찍 김밥 좀 사서 가지고 갈께”하고 덜렁 약속을 해버렸다.

 

  모르는 사람보다는 아는 사람끼리 도란도란 이야기 나눠가면서 낚실 하는 것이 분위기가 훨씬 좋기 때문에 그 후배가 와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12월 9일, 일요일. 금비와 같이 새벽 산책을 갔다 오니 바깥 날씨가 12월 초의 날씨치고는 1월의 한 겨울날씨처럼 장난이 아니게 추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추워서 낚실 안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고생 좀 하겠다 싶었다. 아직도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에 낚시 가방을 챙기려고 하는데 그만 생각이 바뀌었다. 갑자기 가기가 싫어진 것이다. 낚시를 떠난다는 일만큼 즐거운 일이 없었는데, 오늘은 어쩐지 선뜻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낚시를 처음 가는 것도 아닌데 장구하게 서두를 질질 끄는가 하면 친구인 남진관(세례명 바실리오) 의 부인으로부터 걸려 온 한 통의 전활 받고서였다. 후두암으로 근 5년여를 서울의 모 병원에서 힘들게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 같으면 문병도 할 겸 부인에게 위로와 격려를 하기 위해 내가 수시로 전화를 걸어 근황을 다른 친구들에게 알려주곤 했었는데, 전화기 자막에 발신인發信人의 이름을 보는 순간 머리끝이 바짝 곤두서는 느낌과 함께 심상치 않은 전화라는 걸 직감했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불길한 예감이 앞섰다. 처음 얼마간 아무 말도 없이 울음소리만 쟁쟁하게 들려 왔다.

 

  그녀는 복 바치는 설음을 주체할 수 없는 중에 “전데요, 주치의도 어떻게 손쓸 사이도 없이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떴다.”며 “오후 5시 경 부산의 대동병원으로 운구運柩 된다.”는 짤막한 울음 섞인 말만 나누고 나자 전화기가 맥없이 툭하고 땅에 떨어졌다. 충격적이다 라는 감정이 이런 것인가 보다.

  이 전화를 받으려고 후배와 약속한 낚시가 싫어졌는가 모르겠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자신의 죽음을 부산의 유일한 친구인 나에게 제일 먼저 알리고 싶은 텔레파시가 나에게 전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어찌됐던 여러 정황으로 봐 낚시만큼은 잘 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베란다로 걸어 나갔다.

 

  저 멀리 보이는 수영 강을 내려다보았지만, 부산에서 하나 밖에 없는 고향친구이자 어려운 시절 대전공업고등전문학교 의 건축과에서 함께 공부했던 동창생이었던 친구를 잃었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리 힘이 풀려 서있기가 불편했다. 아직도 “남편이 운명했어요, 글쎄.”하면서 전화기 속에서 펑펑 울던 망자亡者 부인의 울음소리만이 귓속에서 쟁쟁거렸다.

 

  “아이고, 이를 어찌해요, 어떻해요?” 뭐라고 위로의 말도 없이 그저 이 말만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 년 1월 달에 혼인 날짜를 잡아 놓고 딸을 위해 휠체어라도 타고 예식장으로 함께 걸어가야 한다고 병실 복도에서 열심히 걷는 연습을 했다는데, 여러 번의 대수술과 그 지독한 항암치료도 거뜬히 잘 견디고 있다고 듣고 있었는데, 우리 카페에 가끔 나와 치료과정을 이야기했었고, 유머 있는 댓글을 잘도 달았었는데, 잘 치료받고 퇴원하면 할 일도 많이 있다고 들었는데, 과년한 아들딸이 연예계에서 재능을 발휘하면서 제법 이름도 알려져 이제는 자리 잡혀간다고 나한테 자랑도 했었는데, 한 동안 카메라에 빠져 그 솜씨가 아마추어급을 벗어날 정도의 촬영기술이 늘었다고 자랑까지 했었는데, 퇴원하면 아내하고 여행이나 다니며 자긴 사진 찍고 아내는 그림 그리며 그렇게 살자고 하면서 오로지 퇴원하는 날만 고대하고 기다렸다고 하는데..........,

 

  나는 딸 결혼식 때 올라가서 축하해줄 겸 병문안도 하려고 했었는데, 나의 바람은 물론 그의 소박한 꿈도 이루지 못하고 그가 평소 믿었던 바와 같이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이 세상에서의 그의 삶은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주님의 궁에서 사오리다.”라는 남 바실리오의 바람대로 천주님의 영가靈家에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영결미사가 있는 동안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하느님이 쓰시기 위해 불러 드렸으니 먼저 가있는 성도들에게 인도하사 그곳에서 쓰임대로 잘 거두시길 바란다.”는 담임목사의 잔잔한 목소리가 성당 안을 가득 메운 신도들뿐만 아니라 교우가 아닌 나까지 가슴 속 깊이 엄숙하고 진지하게 들려왔다.

 

  지난 8월, 염천지하炎天之夏에 세상을 버린 친구 J와 이번에 또 친구 하나가 우리들 곁을 먼저 떠나갔으니 유족들은 물론 그를 아는 살아 있는 자들의 가슴 가득한 슬픔이요 먼저 간 망자에 대한 애석함을 무엇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느님은 태초에 가장 공평한 방법으로 인간들을 제도하셨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 하나는 생자필멸生者必滅이고, 두 번째는 사생유명死生有命이이라는 것이다. 즉 살이 있는 모든 생물은 반드시 죽고 만다는 것이니 죽음만큼은 예외가 없기 때문에 이 이 부분만큼은 모두 공평한 것이다.

  그러나 언제 죽느냐하는 문제는 타고난 그 사람의 운명에 달려 있는 일이고 인명은 재천在天이라 했으니 곧 하늘이 알아서 하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살려고 발버둥 쳐도 죽을 사람은 죽는 것이고 아무리 죽으려고 해도 살 사람은 사는 것이 운명이니 나이와 상관없이 각자 정해진 날짜에 저승사자의 부름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생과 사를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조물주의 계율인 것이다.

 

  사람이 사는 동안 무병無病장수하는 사람이 있다면 만의 하나 정도 있을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또 오래 살더라도 병이 걸려 치료하면서 생을 마치는 치병治病장수가 있고, 득병得病하였다하더라도 그걸 안고 이겨가면서 병과 함께 천수를 다하는 사람, 즉 극병克病장수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이 친구는 치병과정에서 장수도 못하고 요즘은 노인이라고도 볼 수 없는 64세의 나이에 세상을 버렸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말까지 못하는 환자를 위해 눈치코치로 소통하면서 오랜 기간을 그의 수족手足처럼 간호를 해왔던 그의 아내와 유족들은 얼마나 황당하고 비통한 일인가? 정황으로 보아 그도 자신이 그렇게 빨리 가족 곁을 떠날 것이라고는 생각할 여지도 없이 창졸지간倉卒之間에 숨을 거두었을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하느님의 부름이라 할지라도 야속하기 이를데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목사의 연도미사처럼 남 바실리오의 크나큰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하느님께서 부르셨다고 하였으니 질병과 고통이 없는 그 곳에서 부활하여 하느님의 쓰임대로 편안하고 행복한 삶이 이어지길 바란다는 교우敎友들의 바람대로 그는 그렇게 영생의 나라로 떠나 간 것이다.

 

  그 하나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이 세상은 하나도 달라질 것 없이 굴러 갈 것이지만, 유족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부터 그가 못 다 이룬 생전의 꿈과 희망을 오롯이 그의 가족들이 떠맡아 그가 없는 현실을 받아드려 적응해야 할 만만찮은 많은 일들을 지혜롭게 살아줘야 하는 의무가 생겼다.

 

  고인과 가장 가까이 지냈던 나의 친구 고 남 바실리오가 양산의 천주교공원묘원 안에 있는 ‘하늘나라공원’에 유골을 화장하여 안치시키고 아직도 유골의 온기가 남아 있는 유골함을 만지며 “친구야! 잘 가라.”고 절규絶叫해 보았지만, 눈물을 머금고 그곳을 빠져 나와야 했다.

  죽은 자는 거기 하늘나라 공원에 있고 산 나는 그곳을 떠나온 차이로 산자와 죽은 자의 극명한 갈림길에 서서 생각나는 것은 ‘인생처럼 허무한 삶이 없다.’는 것이었다.

 

  “여보! 정말 실감이 안 난다. 금방 눈을 뜨고 있던 당신이, 흑 흑…….”

  하얀 손으로 유골함을 몇 번이고 어루만지며 애통해 하는 미망인의 울음소리가 먼저 안치된 다른 영령들에게도 들렸는지 안치소 전체에 공명共鳴되어 되돌아오는 듯했다. 나흘 동안 빈소를 드나들며 보니 고맙게도 연도해주려는 교우들이 끊임없이 모여 앉아 빈소를 지키며 기도하는 것에 비해 소위 그럴싸한 직분의 사람들로부터 보내온 조화弔花에 걸맞지 않게 조문을 와주지 않아 빈소殯所가 쓸쓸해 보였던 것이나, 장례식 날 영정影幀을 뒤 따르다 뒤 돌아보니 말벗 하나 없이 친굴 하늘나라로 보내줘야 하는 내 마음이나 쓸쓸하기는 매 한가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창시절, 이젤을 들고 화실畵室을 들락거리며 그림공부를 하던 모습과 한 때 잘나가던 건축사로서의 긍지를 유감없이 발휘하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서 지나간다. 이제 우리 친구들은 얼마 안 있으면 연말이 다가 오는데, 흑룡의 이 해에 두 친구 JN을 잃은 비운의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소탈하게 웃으며 날 대해 주던 나의 친구 남진관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이제 아무리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으니 나의 기억 속에서 그리움으로만 남게 되었다.

  붕천지통崩天之痛이라. 믿고 사랑했던 남편을 잃은 슬픔이야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비통하겠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처럼 부디 지친 몸부터 잘 추스르시고 그 동안 애쓰신 보람도 없이 경황 중에 가장을 잃은 슬픔을 거두길 바라는 마음으로 부인과 유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조의를 표합니다.

“친구야! 잘 가시게. 삼가 명복을 비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