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수필,시

[스크랩] ◇ 고독에 이르는 병

이원아 2013. 2. 4. 11:57

◇ 고독에 이르는 병

 

 

 

 

                   “고독감은 이 세상에서 자신만이 홀로 남아있다고 믿는 완전한 주관적 증상이라 이 병에 걸리면 모든 것이 허무하고 공허하며 삶이 무의미해 진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들에게만 있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이 병이 고질화痼疾化 되면 생겨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2013.01.30

 

  <인간만이 고독이라는 병에 걸린다>

 

 

나는 요즘 이런 생각을 다해본다. 작년에 친구 둘을 저승으로 보내며 이제 다시 못 볼 이들에 대하여 설움을 달랬었다. 이렇게 내 곁의 친구가 하나 둘 세상을 다 뜨고 나면 달랑 나 혼자 남아 있는 세상이 얼마나 외로울까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

물론 내가 가장 오래 살아 있을 때이긴 하지만 어쩐지 쿨 한 날 그걸 상상하며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낚시터 같으면 나 혼자라도 낚실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복잡한 주말 보다는 주중의 낚시가 더 좋다. 마리수로 많이 낚이니 낚는 손맛도 더 많이 볼 수 있어서다. 입질이 없어도 조용히 받침틀 주변 발밑의 풀숲을 내려다보거나 물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연과 함께하는 온갖 미물들이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질 않는다.

 

  어디를 가는지 모르지만 머리 위를 가끔 날아가는 이름 모를 새들이 그렇고, 물위 물벌레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그렇다. 작은 새우나 물고기들은 나름대로 생존하려 안간힘을 쓸 것이고 송어 같은 큰 놈들은 제 세상 만난 것처럼 펄떡이며 물위에 움직이는 다른 작은 물고기나 벌레들을 잡아먹기 위해 공중으로 뛰어 오르다 텀벙 물장굴 치며 곤두박질친다.

가끔 낚으려는 대상어가 아닌 이놈이 낚시에 걸려 명상瞑想하듯 앉아있는 나를 깜짝 놀라게 한다. 힘이 좋아 채비가 손상되지 않을까 우려되긴 해도 긴장하면서 제압하다 보면 손맛만은 아이들 말로 정말 끝내준다.

 

  주변에는 아무래도 움직이는 놈들이 있어 관심 있게 처다 보기 마련인데, 낚시터를 지키는 개들도 그렇다. 혼자 앉아 있는 나에게 관심을 갖고 수시로 내 곁을 드나든다. 특히 그럴 때마다 견공들은 내가 불러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와 눈을 맞추고 꼬릴 흔들며 달려든다. 

 

  누가 보면 넓은 저수지에 혼자 앉아 독조獨釣하고 있는 모습이 청승맞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들이 있어 하루해를 보내는데 낚시터는 결코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은 것이다. ‘사람은 이웃과 소통하며 살아야 한다.’며 옛 어른들은 이웃사촌을 매우 중히 여겼다. 나의 유년 시절에도 마을 어른들은 이웃 사람을 사촌보다 더 가깝게 부대끼며 살아왔다.

 

  꼭 명절이 아니더라도 추수가 끝나면 가실 떡이라 하여 이웃과 나눠먹으려고 떡을 나르기 위해 고샅길을 뛰어 다니던 기억이 난다. 집안에 어른이 생신을 맞는 날이면 어김없이 이웃을 초청해 맛난 음식을 내 놓고 이웃과 꼭 나눠 먹으며 소위 정이라는 이름으로 이웃과 소통했던 것이다.

 

  또 대사大事와 같은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이웃과 상의하여 서로 도우며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어려움을 해결하여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른바 품앗이는 그 좋은 예이다.

원수 불구근화요 원친불여근린遠水不救近火 遠親不如近隣이라. 먼 곳의 물은 가까운 불을 끄지 못하고, 먼 곳의 일가친척은 가까운 이웃만 못하다고 하는 뜻이다.

 

  그러나 요즘은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핵가족 또는 독거獨居 가정이 늘면서 이웃을 알려하지 않고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는 정이 마른 세태가 되다보니 이 말 자체가 가지는 아름답고 정겨운 의미가 사라진지 오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까칠한 세상이 되었다. 친구도 마찬가지다.

 

  내가 외롭고 허전할 때 먼 곳에 친구 하나쯤 있어 가끔 그 곳 친구를 찾아가 오랜만에 만나는 운우雲雨의 정을 나눌 수 있으면 내가 행복하다는 말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 다르긴 해도 먼 곳에 있는 친구는 가깝게 사는 이웃만 못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가까이 있는 친구와 관계를 원만히 해야 한다.

 

  작년에 서울 친구의 죽음에는 멀다는 핑계로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해 미안했고, 부산 친구의 세상 버림 시에는 서울의 많은 친구들은 멀다는 핑계인지 아니면 개인사정이 있어서인지 아무도 그가 가는 길을 지켜 주지 못했지만, 가깝게 있다는 이유로 나는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켜주다 하늘나라로 보내서 의리를 지켰다는 생각으로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세상을 살면서 내가 맺은 인연因緣 따라 과果가 있다고들 말하지만, 마지막 가는 길에 슬퍼해줄 친구 몇 명도 없이 떠나가는 그의 모습이 나를 장례기간 내내 우울하게 했었다.

축복 속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가 세상을 떠날 때는 혼자 가는 길이 맞는데도 나 홀로 가는 것 같아 슬프다고 여기는 것은 단지 산 사람 입장에서 본 생각일 것이다.

 

  혹시라도 영혼이 정말 있어 누가 오고 가는 걸 알고 있다면 아마도 영전靈前에 모여 슬퍼해 줄 친구들이 북적 댈 것이지만, 나중에 저승에 갈 값에 우선은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세상이 각박하게 돌아가는 세태이니 누굴 탓하겠는가? 단지 쓸쓸한 생각이 들뿐이다.

생의 마지막 끈을 놓지 못하고 죽음의 문턱까지 가있는 사람의 심정을 나는 다 모르지만, 아마도 그가 느끼는 죽음보다는 당장 생겨나는 사유思惟는 고독감일 것이다.

 

  죽음이 다가 온다는 그 생각만으로도 생의 애착이 절박할 건데 시시각각으로 밀려오는 고독감은 그 어떤 것으로도 걷잡을 수가 없는 일이니 어느 면에서는 죽음의 공포보다도 더 두려울 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 내 주변에서 나와 인연을 맺은 것들이 하나하나 멀어지거나 사라지게 된다. 심지어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예전의 그 맛이 아니고, 소중하게 가지고 있던 애장품愛藏品도 별것이 아니게 보인다. 더구나 젊은 시절부터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친구가 시나브로 세상을 떠나거나 먼 곳에 있어 관계가 소원해진다고 했을 때 불현듯 외로운 생각이 들고 고독해 질 것이다.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밤잠을 설치는 일이 반복되고 그럼으로써 건강을 해치는 경우가 생긴다.

 

지난 19일, 나와 근 38여 년간 절친의 지기가 응급실에 실려 갔다. 아직 병리검사 중이라 자세한 병인病因은 잘 모르겠으나 월남전에 참전 후유증이 있어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터였지만, 그런대로 건강을 잘 지켜왔었는데, 갑자기 입원까지 했다니 당혹스럽고 그의 건강이 염려된다.

 

  그와는 특히 낚시를 함께 하는 동안 3년 가까이나 되는 많은 날들을 텐트 속에서 소야消夜를 하며 조락釣樂했던 조우이기도 한데, 낚시에 관한한 복심지우腹心之友라 문병을 하고 나서 돌아 나오는 마음이 정말 편치 않았다.

 

  푸석한 얼굴을 한 채 한동안 입원치료를 해야 한다고는 말했으나 내 판단으로는 이제 함께 낚시를 다닐 정도로 완쾌가 어려울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드는데, 병상에 누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치병治病의 과정을 겪을까를 생각하니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드는 것이다.

  “자다가 깨 겨우 몇 분밖에 지나지 않은 시계를 보니 긴긴 밤 보내기가 그렇게 지루하더라.”는 그의 말대로 가뜩이나 조용한 밤에 혼자 잠이 오지 않으니 온갖 생각들이 떠오를 것이고 결국은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마음의 병이 그를 그렇게 했을 것이다. 부디 이전의 몸으로 완쾌되어 다시 함께 낚실 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딸아이의 시어머니, 즉 안사돈께서 입원을 했다.

  수 년 전부터 간 쪽에 조그만 암 덩어리가 있어 시술을 몇 번이나 한 채로 살림을 해 올 정도였는데, 급기야 전신으로 퍼진 암세포가 세상의 끝을 알리는 상황이라 결국 기장의 원자력의학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에 문병을 다녀왔다.

 

  고희古稀가 된 나이라 옛날 같으면 살만큼 산 나이였지만, 얼굴에 약간의 부기는 있었으나 겉모습만으로는 건강한 듯 보였는데, 시한부로 살아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받은 상태이니 내가 가서 무슨 말로 위로의 말을 하겠는가?

  “아무리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고는 하지만, 그저 기적이라는 것도 인간 세상에는 가끔 일어나는 일이니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치료의 길을 찾아보겠다.”는 바깥사돈의 의연한 말만 듣고 돌아왔을 뿐이다.

 

  “IMF시절 운영하던 사업이 다 망하고 힘들 때 너무 고생했던 아낸데, 이제 손주들과 재미나게 여생을 보내려고 했는데, 그냥 이대로 보내기가 남편으로서 너무 불쌍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노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사람은 끝이 좋아야 다 좋은 거라 했는데, 앞으로 부인이 없는 바깥사돈의 말년의 노후생활이 평탄치 않을 것을 생각하니 또 같은 남자로서 측은하고 안쓰럽게 보였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으나 당신이 고생될까 걱정이다.”라고 말하는 안사돈은 오랜 기간 신앙생활에서 나온 강한 믿음이 있어 마음은 이미 각오한 것처럼 초연해보여도 그녀도 역시 인간인데 왜 죽음이 두렵지 않겠는가?

 

  반복되는 항암치료로 인해 식사를 잘 못해 그저 연명하는 수준으로 침대에 앉아 있는 안사돈의 초췌한 몰골을 보니 죽음을 앞에 둔 환자는 죽는 날까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정신적으로 겪을 외로움과 고독, 지나간 날들에 대한 회한, 사랑하는 자식들에 대한 애착과 남겨둘 남편에 대한 연민, 평생을 함께 관계한 친지들과 이웃들을 생각하면 잠인들 편하게 잘 수 있을 것이며 먹고 싶은 것이 뭐 있으랴?

 

  건강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다고 했으니 안타깝지만 이제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인연을 끊어야 할 운명이다.  비록 사돈의 관계로 나와 인연을 맺은 사이지만, 그저 한 인생이 왔다가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한 여인의 애처로운 모습만 눈에 어른거린다.

바깥사돈 말대로 정말 이 댁에 기적이 일어나 다만 몇 년 만이라도 더 연명을 하다가 회한 없이 세상을 떠난다면 좋겠지만 타고난 운명을 어찌 거역하는 힘이 어디 있을까?

 

  인생여부운人生如浮雲이라. 인생은 한갓 뜬구름과 같이 금세 사라진다는 말이다. 인생의 덧없을 뜻하는 말일게다. 새해 벽두부터 옛 직장의 동료나 지인들의 부음訃音이 들려오고 주변의 친구나 인사들이 우환에 시달리고 있는 때 나 역시 생로병사 중 아무래도 병에 시달림이 많은 나이에 낀 세대가 되고 보니 부질없이 많은 생각들이 나를 서글프게 한다. 고독이라는 병은 인간들만이 앓는 정신질환이라고 한다.

 

  자기 영역만을 지켜가며 사는 동물들이야 늘 배가 고프니 먹고 사는 일로 평생 일을 해야 하고 그 하나 목숨 부지하는 일이 삶의 전부이니만큼 외로워할 시간이 어디 있으며 그럴만한 여유가 없을 테지만, 더불어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들은 평생을 살다 죽을 때까지 누구나 고독이라는 병을 한 번 이상 걸려야 할 병이 바로 이 정신질환이라는 것이다.

 

  고독감은 이 세상에서 자신만이 홀로 남아있다고 믿는 완전한 주관적 증상이라 이 병에 걸리면 모든 것이 허무하고 공허하며 삶이 무의미해 진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들에게만 있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이 병이 고질화痼疾化 되면 생겨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특히 노년들은 산전수전山戰水戰 공중전까지 다 치른 기억과 추억을 가지고 있다. 사회적 영향력이 많았던 사람일 수록 이 병에 취약하다고 한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므로 항상 타인과 더불어 생활하고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 날 무인도와 같은 곳에서 홀로 살아가야 한다면 아마도 고독과 외로움이란 고통으로 하루를 견디기 힘들 것이다.

 

  특히 중병을 얻어 병석에 누워 있으면 엄습해 오는 두려움과 고독감에 시달리고, 자기가 살아 온 것에 대해 추억하길 반추反芻하다 보면 공허해지고 외로움이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은 홀로 왔다 혼자 간다.

 

  아무리 그렇다하더라도 가료加療중인 말기 중환자들은 대부분 죽음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생에 대한 애착이 더 커진다고 한다. 죽음의 공포와 고독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일반인으로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지만, 그러나 누구도 치료해 주거나 대신할 수 없는 부분이므로 내 안사돈의 경우로 볼 때 신앙信仰을 갖고 받아들이는 일은 다소 위안이 되는 일로 보여 진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할 때 적극적인 취미생활로 활력을 얻도록 하거나 친구는 물론 가능한 나와 인연 맺은 사람들과 자주 만나서 어우르고 아우르며 세상에서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걸 몸소 깨닫도록 적극적으로 살다보면 고독감이나 외로운 생각들이 사라진다. 친구야 빨리 나아 낚시나 가자.  또 생의 종착역에 있는 사람들은 신앙의 힘을 빌려 고독과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삶으로 살다 간다면 생전에 또 다른 의미의 깊이 있는 삶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천지신명天地神明이시어, 지금 앓고 있는 모든 분들이 하루 빨리 쾌차하여 그들이 겪고 있는 공포와 고독에서 벗어 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친구들아, 나는 그대들이 있어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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