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수필,시

◇ 부산, 부산생활 40년.

이원아 2015. 4. 21. 15:26

◇ 부산, 부산생활 40년.

  

 

               "부산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곳에서 함께 성장해가는 도시를 품고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다른 사람들과 이해의 폭을 넓혀가면서 여생을 살다보면, 이제 후손들은 필자가 잡아 논 터전을 근거지로 부산이 제 고향으로 여기고 잘 살아 주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2015.04.05

 

<필자의 현 거주 아파트>

 

어느 모임에서 지인들과 담소 중에 뜬금없이 언제부터 우리가 부산에 살게 되었는가가 회자膾炙되었다.

  서로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따지다 보니 대부분 필자와 같은 무렵 부산에 와 지금까지 살게 된 지가 어언 40년 전후가 되었음을 알게 되면서,

  “엊그제 온 것 같은데 지난 세월이 참 빠르게 지나갔다.”고 합창이나 하듯 말하며 회상했다.

  강산이 네번 변한 세월, 이것저것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그냥 여기가 내 생업기반이라 생각 없이 달려 온 세월이 이 정도면 제 2의 고향이라기보다는 부산사람, 그냥 부산이 고향이 된 셈이다.

 

  필자도 이제 망칠望七의 늙은 나이라 그런지 한 숨 자고 나면 금세 되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데, 그러다 가만히 반추해 보니 참 적지 않은 세월이 흘러갔음으로 인해 지난 일상의 삶 또한 무상했음이 추억 속에 떠오른다.

  가정형편이 찌들게 궁색한 빈농출신으로 어렵게 학교 졸업 후 강원도 동해시(당시 묵호읍)에서 공무원직을 처음 시작하며 그 곳에서 결혼, 삭월세 단 칸 방으로 신접살림을 시작하다 아들, 딸 둘을 얻고 마냥 행복해 하던 시절.

  당시 국내에선 처음으로 세계경제개발부흥은행(IBRD)에서 외화를 들여와 부산항을 신항만으로 개발하던 초기, 필수요원이 되어 강원도에서 부산으로 전근 된 것이 필자가 우리나라의 제2의 도시요, 항구로선 제일 큰 부산에서 살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부산으로 전근 발령을 받고 부임하기 위해 생 후 두 달도 채 안된 딸아이를 데리고 오던 해가 바로 염천지절炎天之節인 1975년도 7월 26일이었다. 전근 오던 그해 그날, 유난히 더웠던 한 여름이라 급행열차라지만 차 안의 선풍기만으로는 더위를 이길 수 없었는데, 특히 딸아이는 온 몸이 불덩어리 같이 열이 나고 땀을 흘리며 울어대는 데 이 아일 어르고 달래느라 진땀 뺐던 일이 생각이 난다.

  그리고 아이들과 처제, 동생들 까지 서울, 대전에서 이사를 도와주러 왔는데, 전세계약을 취소하겠다는 집 주인의 황당한 말에 도랑가에 쪼그리고 앉아 집 없는 설움에 눈물까지 흘렸던 일은 도시에서 집 없는 서러움이 어떤지를 알게 해준 잊을 수 없는 삶의 체험현장이기도 했다.

 

  얼마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 이유가 더 가관이었다.

  전라도와 경상도간의 지역감정이 심했을 때이니 필자의 충청도 사람 말투가 전라도 지방의 말씨와 흡사했다하여 그렇게 오해를 한 모양이고, 더구나 아이들까지 딸렸으니 주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생전 처음 당하는 일이라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처사였지만, 계약은 일방적으로 파기 되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초저녁 때이지만, 이미 어둠이 깔려 있는데다가 낯설고 물 설은 곳에서 이 대식구들을 데리고 어디가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할 말을 잃고 어안이 벙벙했다.

  참으로 인정머리 없는 집 주인의 처사가 야속했다.

  아내와 동생, 처제는 나의 어떤 결정이 있기만을 기다리며 고개만 푹 숙인 채 쫄쫄 물이 흐르는 개울가에 일렬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더욱 서러운 감정이 벅차올랐다.

 

그  러나 이때, 천붕우출天崩牛出이라더니,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정말 구세주가 나타났다.

  생면부지生面不知의 나이든 아주머니께서 웬 사람들이 저렇게 앉아 있는가 싶었던지 지나가다 우릴 보고는 말을 걸어왔다.

  “아니, 왜 이렇게들 도랑가에 쭉 앉아 있어요?”

  전후 사정을 듣던 아주머니는 딱한 처지를 직감했던지 두말없이 자기의 집으로 우릴 거둬 주셨다.

  “우선 갓난아기도 있고 하니 하룻밤 우리 집에 가 자고나서 밝은 날 방을 구하는 게 좋겠다.”면서 우릴 안내했다.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라 머릴 조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되지 않으니 이삿짐 트럭은 대문 앞에 세워 두고 안내하는 대로 줄 줄 따라 가니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페인트 냄새가 나는 2층 빈방이었다.

 

  아무리 한 여름이라고 하지만 이불 같은 덮을 것이며 모두 이삿짐 차에 함께 묶여 실어져 있으니 대충 그렇게 하여 자고 나니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기침을 해 댄다. 밤의 기온차를 간과했던 탓으로 모두 여름 감기에 걸려 한 동안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충청도 촌놈이 대도시의 첫 날밤 신고식을 호되게 치르고 부산의 생활이 그렇게 시작됐는데, 그 때 이 심정을 자식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 까? 난처할 때 이름도 성도 모른 그때 연산동 이웃집 그 아주머니의 사려 깊은 배려에 대해 이 글을 통해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리고 싶다.

 

  어언 40연 년이 지나간 세월은 그야말로 필자에게는 황금기 같은 시절이었다.

  새롭기만 한 도시생활을 적응하느라 간간히 마음고생도 있었지만, 아이들 건강하게 잘 건사하면서 이곳, 부산에서 직장생활 중 주경야독하며 대학원 공부도 할 수 있었고, 건축사자격을 얻는 등 꿈과 희망을 키운 점은 보람이었다.

  가장 애석한 일은 부모님과 누님, 형님은 세상을 하직하신 점이고, 바로 1년 전, 세월호가 물에 잠겨 어린학생들을 수장시킨 사고가 나던 날 필자의 애견 금비가 내 곁을 떠나니 이래저래 그날은 슬픈 날이라 기억이 새롭다.

 

  가족적으로는 아들과 딸을 제가 원하는 대학과 대학원까지 가르치느라 경제적으로는 힘은 들었지만 보람도 컸다.

  더구나 별 탈 없이 성장하여 좋은 배필을 선택해 출가해서는 요즘 많이 안 낳는 시대에 상관없는 듯 딸아이는 2남 1녀를, 아들 녀석은 2남을 낳아 장중보옥掌中寶玉보다 더 소중한 손주들을 다섯 명씩이나 안겨주니 자식들은 어떤 면에서 애국자이고, 필자는 덩달아 식구수가 그만큼 늘어난 셈이니 행복지수가 올라가지 않을 수 없으니 행복한 것이다.

  반듯한 집 한 채 장만하느라 열한번씩이나 이삿짐을 옮겨 다닐 때마다 애환을 견디며 이제 안주한 도시생활, 그 때마다 고충을 생각하면 지금은 몸도 마음도 부자가 되었다고 자부하면서 살고 있으니 건강만 허락한다면 별 욕심 없는 삶을 살고 싶다.

 

  부자가 뭐 벌거랴?

  빈이유여貧而有餘이니 가난하지만 등 따시면 되는 것이고, 자행자지自行自止이니 내 하고픈 대로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 삶을 살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쉽지는 않겠지만 요즘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중이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비빌 머리는 물론이고 발 하나 손 하나 어디 디딜 곳도 없이 시작한 생활이었지만 여태껏 남의 손 안 벌리고 살았으니 자부심도 있다. 그러나 어디 필자라고 삶의 질곡이 왜 없었을까?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무얼 할 것인가?’라는 요즘 어느 광고의 카피가 생각난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필자에게 묻는 다면 지금과 별 다른 것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지금에 와 돌이켜 보면 뭐할 것인가? 그저 지금 당장, 현재의 삶이 중요하지 않은가? 어느 모임에 갔더니 지인 한 사람이 무슨 말 끝에,

  “요즘 나는 아침마다 주변 산을 뛰어 다니니 돈 들일 일 없고, 평소 취미로 즐기는 테니스클럽에 가도 65세가 넘었다고 회비도 없이 함께 운동을 하고 있어 좋고, 또 돈 들어가는 자동차 없이도 불편함이 없는 요즘 생활이 매우 만족하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길 했다.

 

  경우에 틀린 말은 아니지만, 평소에도 자칭 재벌이라고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길 했었든 그인지라 다른 사람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쉽게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가 말한 저변에는 먹고 살만하니까 그런 소릴 한다고 하겠지만 필자는 생각이 다르다. 부와 관계없이 그렇게 사는 것이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면 되는 것이지 그가 사는 방식을 갖고 다른 사람이 뭐라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가 행복하게 사는 나름의 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가 그려진 카드를 보여주면서 무슨 생각이 나냐고 물어보면, 참으로 생각들이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수학자는 덧셈이라 말하고, 산부인과 의사는 그것이 배꼽이라고 답한단다.

  신부는 십자가라고 하고, 교통경찰은 사거리라고 하며, 간호사는 적십자라고 하고, 약사는 녹십자라고 대답한다는 것은 모두가 다 자기 입장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이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를 뿐’이다. 결론을 말한다면, 상대방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늘 이해의 대상인 것처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것에 대해 비판하기 보다는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어쩐다 해도 자신이 나고 자란 옛 고향을 잊을 리야 없겠지만, 이제 부산에서 산지가 무려 40년이 되고 보니 어쩜 옛 고향 그 어느 곳보다도 부산의 구석구석 속내들을 더 잘 아는 토박이가 된 셈이다.

필자는 최근 갑상선암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고, 아내는 허리가 부실해 곧 수술을 해야 하는 등 건강이 예전과 같지 않으니 걱정되는 면도 있으나, 부산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곳에서 함께 성장해가는 도시를 품고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다른 사람들과 이해의 폭을 넓혀가면서 여생을 살다보면, 이제 후손들은 필자가 잡아 논 터전을 근거지로 부산이 제 고향으로 여기고 잘 살아 주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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