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멜론 향에 향수를
“남편을 일찍 사별하여 오랜 세월을 이 염천炎天의 삼복더위보다도 더 견뎌내기 힘든 외로운 밤을 경경고침耿耿孤枕하며 사는 내 동생이라고 두둔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격이 좋아 이웃들과 살갑게 잘 지내는 것은 물론 여자가 농사 일 하나는 정말 웬만한 남자 농사꾼보다도 더 열심히 그리고 누구보다 잘 지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잘 익은 멜론 향보다도 순수하고 근면한 삶의 향기가 묻어난다.” 2012.08.14
<단양8경을 관광하고 돌아 오던 중 고속도 휴게소에 펼쳐놓고 점심을 먹는 동생들>
우리나라의 기후는 지리적으로 중위도中緯度 온대성 기후대에 위치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겨울에는 한랭寒冷 건조한 대륙성 고기압의 영향을 받아 춥고 건조하며, 여름에는 고온다습한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무더운 날씨를 보이고, 봄과 가을에는 이동성 고기압의 영향으로 맑고 건조한 날이 많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기후에 대한 정설이었다. 하지만, ‘사계절이 뚜렷하다’고 배워 알고 있던 날씨에 관한 것은 이제 옛날이야기가 된 듯싶다.
강화도 인근해역에서 대표적인 아열대성 어종 흰동가리 집단 서식지棲息地가 발견돼 기후변화와 생태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충격을 준 것처럼 바다에서는 열대성 물고기의 서식처가 늘고 남쪽지방 곳곳에서는 특용작물이라 하여 이미 열대성 과일이 재배 된지 오래다.
잘 알다시피 요즘 바나나, 오렌지, 키위 등은 누구나 즐겨 먹을 수 있을 만큼 흔하고 값싼 과일이 됐다. 그러나 이 외에도 구아버, 아보카도, 망고, 용과, 파파야, 블루베리 등 아직은 이름조차 생소한 열대ㆍ아열대 과일의 재배 북방한계선이 제주를 비롯한 한반도까지 올라 온지도 제법 되었다고 한다.
모든 과일을 가리지 않고 어느 누구보다도 더 즐겨먹는 한 사람으로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사는 근처 도시 밀양에는 유명 브랜드인 얼음골 사과가 있는데, 꿀맛처럼 달고 맛있어서 그곳을 들르는 길에는 꼭 사서 즐겨 먹곤 했었다. 그러나 그 맛은 예전과 같지 않다고들 말한다. 어딘가 모르게 푸석하여 식감이 떨어지고 당도糖度가 적어진 느낌이다. 그런가하면 우리나라 대표적인 과일인 대구사과보다는 저 위 경북지방의 청송사과가 맛있게 감미甘味 돼서 그런지 제철에 인터넷 판매실적을 봐도 알 수 있는 현실이다.
내가 어릴 적에는 어른들이 단감나물 심으면 씨가 생긴 땡감이 열린다하여 우리 고향에는 단감나무가 단 한 그루가 없었다. 그런데 부산 근교 지역의 대표적인 가을 과일이라고 할 수 있는 진영의 단감보다는 위도상으로 내 고향과 비슷한 경북 상주지방의 그것이 더 크고 단맛이 있었다.
지금 내 고향에서 단감이 열리는지는 확인해보지 않아서 알 수 없으나 지난 해 가을 동생들과 함께한 속리산 법주사를 관광하던 차 노변에 내 놓고 파는 감이 먹고 싶어 중얼거리듯 “야, 단감 좀 봐. 진영단감이 여기까지 올라 왔다!” 그 소릴 들은 상인 아주머니가 대뜸 반응을 하며 상주 산이라기에 의외다 싶어 사먹어 보니 그 식감으로만 보면 확실히 아열대로 진입하는 과정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가 아열대에 접어든 징후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요즘 웬만한 마트에 가보면 이름을 잘 모르는 과일들이 눈에 띠는 걸 볼 수 있다. 처음 보는 과일이라 관심 있게 처다 보면 분명히 한국산이라는 원산지 표시가 되어 있다.
재배기술이 발전되었다고는 하지만 역시 기후 변화가 만들어 낸 외국종外國種의 국내산 과일인 것이다.
제철에 전라도 남쪽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한라봉, 석류, 무화과 등 수입에만 의존하던 열대성 과일들을 도로 곁길 곳곳에 수북하게 쌓아놓고 파는 농민들을 볼 수 있는데, 다양한 종류의 과일을 먹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겠지만, 빠르게 변하는 기후에 의해 이러다가는 사과, 배 같은 순 토종 국산과일들의 설 자리가 위협받는 시대가 닥칠지 모를 일이다.
올 해의 여름 피서는 7월 29일부터 31일까지 2박 3일 동안 고향의 여동생 집에서 보내기로 하고 형제자매들이 다 모였다. 이 동생은 혼자 몸으로 제법 넓은 하우스에 호박이나 고추, 시금치 같은 기초 농작물을 재배하여 근근득생僅僅得生하면서 살고 있는 여동생이다.
여장旅裝을 풀고 자리에 앉으니 멜론을 양 손에 들고 내 놓으며 “오빠, 이거 내가 시험적으로 처음 심어 본 건데 얼른 자셔 봐요”라며 쓱쓱 칼질을 하여 껍질을 벗겨 내 놓는다.
“꼭 25개가 달려 있었는데 잘 익었어요.” 그러면서 “키가 나보다도 더 크게 자란 고추밭 하우스 한 쪽에 그냥 몇 그루 심어 본 것이 주렁주렁 매달려 색깔까지 노라니 아주 화초花草처럼 보기도 좋고 잘 익어서 맛도 달다.”고 했다. 내 입맛으로는 전문적으로 농사를 지어 생산한 그 맛보다도 더 달고 물이 많아서 아주 양껏 멜론을 먹어 치웠다.
내가 자랄 때는 어디서 참외 하나 얻어먹는 것이 소망이라 참외 농사짓는 친구 원두막에서 함께 놀면서 가까이 지냈었다. 어쩌다 들고 나온 참외 한 개라도 얻어먹을 요량에서였다. 친구들과 멱을 감고 놀다 천변川邊 자갈밭에서 마구 자란 개똥참외 하나라도 발견할 때는 꼭 무슨 보물을 캔 것처럼 반기며 먼저 따 먹으려 경쟁했었다. 돌아가면서 한 입씩 물어 뜯어먹고 좋아했었다는 어릴 적의 이야길 하며 올 해는 동생 덕분에 맛있는 열대 과일을 이렇게 맛있게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하고, 풍족하게 먹으니 이 과일 하나에서 부자 부럽지 않게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낀다고 하니 동생들은 자꾸만 더 먹으라며 내 앞에다 멜론을 통째로 데굴데굴 굴려 보내며 웃어 제킨다.
이 폭서暴暑에 비닐하우스 속에서 땀이 범벅이 되도록 혼자 그 많은 농사일을 하는 것을 보면 오빠로서 측은한 생각이 먼저 들어 멜론 하나 채소 한 포기라도 그냥 앉아 받아먹는 것이 마음 편치 않지만, 여동생은 개의치 않고 사뭇 즐거워하면서 음식상을 차려 내면서 이야길 한다. “호박이 끝물이라 넝쿨을 걷기 전에 수확한 애호박을 대전의 농산물경매장에 보냈더니 20개들이 한 박스에 겨우 4,000원에 경매되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며 다 헛 지랄이여, 오빠. 작년에는 좀 나았는데......”
내가 “아이고, 요즘 마트에선 주먹만 한 거 한 개 천원 가까이 하던데.”하였더니 “그러니 농사꾼만 죽는 일예요” 동생의 씁쓸한 웃음이 내 가슴을 먹먹하게 하면서 대화가 끊긴다.
남편을 일찍 사별하여 오랜 세월을 이 염천炎天의 삼복더위보다도 더 견뎌내기 힘든 외로운 밤을 경경고침耿耿孤枕하며 사는 내 동생이라고 두둔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격이 좋아 이웃들과 살갑게 잘 지내는 것은 물론 여자가 농사 일 하나는 정말 웬만한 남자 농사꾼보다도 더 열심히 그리고 누구보다 잘 지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잘 익은 멜론 향보다도 순수하고 근면한 삶의 향기가 묻어난다.
본시동근생本是同根生이라. 우리 모두 원래는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형제들 아닌가? 이제 모두들 나이가 들어가고 해서 그런지 해마다 갖는 동생들과의 여름휴가지만 해마다 다른 의미가 생겨나고 형제애가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나만의 감정은 아닐 것이다.
사는 동안 그저 이렇게라도 만나 어릴 적 함께 자라면서 나누지 못했던 정들을 고향 땅에서 함께하는 일이야 말로 우리 피붙이들의 끈끈한 정이고 우애라 생각하니 올 여름 무더위쯤은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었다.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은 지 자매간이 나란히 누워 날 새는 줄 모르며 정겹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그렇지 않아도 짧은 여름밤이 그야말로 더 일찍 날이 새는 것 같다. 이번 모임에서도 부모님 살아 게실 때나 형님 생전에 이런 자리를 함께하지 못한 것이 늘 송구스런 마음 한 편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남은 형제들이라도 우애 있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 영가靈家에서 내려다보실 영령께서도 흐뭇해하실 것이라 믿으며 잠시 삼가 명복을 비는 자리도 됐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마지막 별식은 남동생 몫이었다. 이 동생이 재종 동생과 함께 이웃 호탄강에 나가 투망으로 잡은 팔뚝만한 잉어와 피라미, 동자개, 꺽지 등과 생질 녀석이 외삼촌들이 매운탕 좋아한다고 밤 새워 낚아 온 큼직한 쏘가리 몇 마리를 함께 넣어 끓인 어죽의 맛은 아이들 말을 빌리자면 아주 그냥 끝내 주는 그 맛이었다.
무엇보다 식사 때마다 여동생들이 오빠들과의 여름 만남을 위해 이른 봄부터 산야를 휘저으며 채취採取해 뒀다가 조리한 산나물 종류와 손칼국수 등 시골스런 음식들을 식탁 가득 차려 놓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먹었던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어디 꼭 고기가 있어야 진수성찬이랴! 한 잔 술에 취하는 체질이지만 동생들의 흥이 있고 반주飯酒가 있으니 안 취할 수가 없었다.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금방 안다.’고 작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뿔뿔이 제 삶터로 돌아가야 하는 시각이 되니 형제자매들이 부산을 떨다 떠나간 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질 여동생이 오늘따라 더 측은惻隱해 보인다. 식탁 위에 덩그마니 놓여 진 멜론을 보니 다시 여동생의 하우스에 주렁주렁 매달린 노란 멜론이 보이고 동생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과 함께 오버랩 되면서 입안에서 군침이 돈다.
이번 모임 때 덤으로 관광한 단양8경 여행을 비롯해 저마다 살아가는 동안 가슴 속에 새겨 둘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한 핏줄이라는 동질감으로 녹여 진 형제애를 진하게 느끼면서 삶의 활력소活力素가 돼주길 바랄뿐이다.
동생들아! 나는 너희들이 있어 행복하다.
남은 더위도 만만치 않으니 몸 건강히 잘 지내다가 내년에 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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