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 집도 집이다.
“비록 잡초만 무성한 마당이고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집일지라도 나의 추억어린 얼이 담겨있는 곳이고, 구석구석 생전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묻어 있던 흔적과 할머니가 홍시 따주시던 감나무, 죽순나무를 비롯해 고향의 냄새와 소릴 오감五感으로 느끼며 향수를 달랬던 곳이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현실, 즉 타향에서조차도 내 천리안으로 집과 터의 무늬를 볼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 2014.02
<고향의 옛집, 터무니가 사라졌다>
고향집은 어머니요, 유년시절을 떠올리는 추억의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나는 눈을 감고도 고향 과 고향의 옛집을 훤하게 볼 수 있는 천리안千里眼 을 가지고 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천리안으로 고향을 보고 있으면 내가 살던 옛 집이 보이고, 어머니가 보이기 때문에 가끔 추석이나 설 명절 같은 고향을 그리는 때가 되면 이젠 아무도 안 계시니 그곳을 가진 못해도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고향엘 다녀오기도 한다.
마당 구석에 매어 있는 소가 내쉬는 긴 숨소리와 함께 워낭소리나 개울물 소리, 바람소리, 교회 종소리 같은 온갖 소리로 듣는 것은 물론 흙이나 나무, 풀 한 포기에서 느끼는 냄새도 고향의 것은 다르게 느껴진다.
이와 같이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비단 소리뿐만이 아니고 냄새에서도 알 수 있지만 보는 것은 역시 가만히 눈을 감고 천리안으로 들여다보아야 더 잘 보인다.
일단 조용한 곳에서 분위기를 잡고 눈을 감는다. 이 때 고향에 다녀와야겠다고 자기최면을 먼저 건다. 앉거나 누워있는 자세라도 상관없다. 부모님 기일이나 명절 등 어떤 이벤트가 있는 날이면 더 잘 보인다.
그 상태로 흙먼지 흩날리던 옛 신작로新作路를 한참을 따라 가다 초등학교가 나오면 맞은 편 길로 들어선다. 마을 초입에 서서 마을 뒤 월이산 쪽 부모님 산소가 있는 쪽을 향해 묵념을 올리고, 마을을 향해 걸으며 동네 맨 위쪽에 이내 빨간 지붕이 보이는 옛 집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어귀에 들어서 커다란 둥구나무를 지나 고샅을 지나며 밖에 나와 계신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엉성하게 만든 사립문을 들어서면 어머님이 버선발로 뛰어 나오시며 반겨 주시던 모습이 그려지는 필자의 옛 고향집이다.
여름 장마철엔 장독대에서 비설거지하시고 가을 무서리가 내릴 즈음이면 울타리에 붙어 하얀 베적삼 입고 호박잎 따 끼닐 염려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소일거리긴 했지만, 마당 구석 텃밭에는 상치, 무, 배추, 마늘, 가지, 고추 등 온갖 푸성귀나 토마토, 고구마 등을 조금씩 철 따라 심어 놓고 자식들이 드나들 때마다 금방 먹을 수 있도록 손수 정갈하게 씻어 내 주시던 모습이 보인다.
특히 한 여름 필자가 가장 좋아해 상표로 이름 진 ‘울엄마표 냉칼국수’는 정말 맛이 있어서 여름 한 철 별미였다. 이를 위해 펌프를 잦던 모습이 보이고 요즘도 여름만 되면 애호박을 고명으로 한 펌프물에 냉칼국수를 말아 먹고 싶어지지만, 이제는 그 맛도 그 모습도 모두 가물가물해졌다.
울타리 쪽으로 조생종 옥수수와 만생종 옥수수를 적당히 심어 놓고 올되는 옥수수는 손자들 방학 맞아 들를 때, 삶아 주려고 하심이었다. 작은 키로 옥수수 이랑에 서시면 더 작게만 보이셨던 어머님은 금세 한 소쿠리 쪄 마루위에 내 놓고 실한 것으로 골라 주시며 “애빈 이걸 먹어 봐.”라시며 미소 짓다가 손자의 눈치를 살피시던 모습이 보인다.
텃밭에서 허릴 구부린 채 무언가 일구시는 모습과 밭가에는 항상 키 작은 채송화를 심어 놓고, 대문 앞에는 접시꽃이나 맨드라미, 봉숭아, 붓꽃 같은 화초를 가꾸셨다. 드나드실 때마다 물 한 바가지씩 부어 길러 꽃을 피워 놓고 마루에 걸터앉아 홀로 감상하시던 모습이 보인다.
예전에는 내 고향에도 눈이 많이 내리던 곳이었다. 특히 이 맘 때 겨울눈이 많이 내리면 고샅에 놀러 나온 동무들도 집밖을 잘 나오지 않아 심심했다. 울타리 나뭇가지 위에 사르륵 사르륵 소리 내며 눈이 내리는 날이면 눈 때문에 나가 놀지 못해 방구석에서 먼지만 일구며 놀 수밖에 없어 따분해 했었다.
이 때 슬쩍 나가시어 광에서 잘 익은 고욤을 퍼들고 와 이거나 먹고 놀라며 내 놓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처다 보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요즘 같으면 구경조차 하기 힘든 고욤그릇을 둘러싸고 앉아 경쟁하듯 서로 더 먹겠다며 입 안 가득 넣고 우물거리며 맛나게 퍼먹고 있는 자식들을 처다 보고 있었을 당시 부모님들의 그 속마음을 어찌 다 이해하겠는가?
구로지은劬勞之恩이라. 누구나 없이 가난하게 살았던 시절 어떻게 하던 굶주림을 면해 주려 애쓰셨던 무모님의 그 마음고생과 노고를 부모가 돼 그 은혜를 알게 되었을 때도 정말 무엇 하나 효도 한 번 제대로 못한 것만 생각이 난다.
세상이 아무리 달라졌어도 살아온 과거는 추억으로 굳어져 있다가 눈을 감고 있을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굴러 나와 나를 새롭게 추억하게 만든다.
사립문 쪽 커다란 대추나무 밑에 송아지 매어 놓고 꼴을 베다 주면 송아지는 먹일 보고 눈망울이 반짝거렸고, 아버지는 그런 모습에 어린 것이 대견하신 듯 당신 특유의 미소를 보이며 흐뭇해하시던 모습도 보인다. 아버진 맛있게 풀을 먹는 소의 머리에 단 워낭소리만을 듣고도 소의 여러 면면을 아시었다. 한 밤중 주무시다가도 그 소릴 듣고 배가 고픈지 어디가 불편한지를 아시고 외양간을 들락거리셨다.
어느 가정이나 소는 재산목록 제1호였을 당시, “이 소 잘 키우면 네 몫이다.”라는 말씀만을 굳게 믿고 방과 후 소 먹이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유년시절이 보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대전의 사범학교師範學校에 다니시는 형님의 학비로 충당하기 위해 장에 내다 팔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허탈한 마음에 뒷동산에 가서 홀로 울기도 했던 그 동산이 눈을 감고 보면 그 때처럼 크게 보인다.
아버지 중풍을 오로지 당신의 손으로 직접 수발하시다 사별 후 혼자 지내기 적적하시다고 이웃집에서 얻어다 기른 노란색 황구黃狗도 필자가 간만에 들를 때마다 불쑥 대문을 들어서도 먼저 날 알아보고 반겨들던 모습도 추억 된다.
필자가 여러 형제들과 함께 이런 저런 추억을 간직한 옛집, 안채 옆에 ‘95년, 선친先親께서 돌아가시고 홀로 계실 어머님을 위해 방 한 칸과 거실을 겸한 부엌이 있는 조립식 형태의 주거공간을 마련해 드렸었다.
불럭조 슬레이트지붕인 안채는 비워 둔 채 새집에 주로 기거하시다가 ’05년 설 명절을 불과 얼마 안 남겨 놓은 채 세상을 버리시었으니 당신은 시골답지 않게 보이라와 상수도 시설,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제법 현대식 가옥에서 명목 상 만 10년을 기거寄居-사별하시기 전 약 5년간은 중환을 얻어 각지에 흩어져 사는 형제들이 돌아가며 모시다가 종국에는 필자가 살고 있는 부산 근교 양산공립노인요양병원에서 향년 90세를 며칠 남겨두고 영면-하시던 그 집에 계실 때는 어머님이 구심점이 되셨기 때문에 필자는 물론 형제자매들이 고향을 생각하며 수시로 드나들던 그런 집이였다.
부모님 생전 명절이나 생신 같은 때, 아이들과 함께 부모님을 찾아 뵐 때 의문지망依門之望하신 채 “동구 밖에 들어오는 자동차만 처다 보며 혹시 느덜인가 싶어 몇 번을 드나들었다.”는 말씀과 떠나보냄이 아쉬워 대문 밖까지 나와 서서 눈에 안 보일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손만 내 저으며 배웅해 주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아른아른 보인다.
정서적情緖的으로 고향은 어머니요, 마음의 안식처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누구나 고향을 잊지 않고 그리워하게 된다. 꿈엔들 잊지 못하는 곳이 고향이요 어머니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눈을 감아도 고향집이 잘 안 보인다.
아니 보여도 옛 집이 아니요, 옛 고향이 아닌 낯선 타향他鄕처럼 보인다.
지난 해 말, 유년시절과 어머니를 추억하기 위해 자주 눈을 감고 그리던 고향 옛집을 사정에 의하여 형수가 팔려한다는 동생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비어왔다.
비록 한두 번 드나드는 고향 길에 고향을 들러보는 일이 있더라도 이제는 그 집을 함부로 들어가 볼 수조차 없게 된 것이 필자는 서운함이 지나쳐 슬프기까지 했다. ‘한 치 걸러 두 치요,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듯이 조카도 아니고 형수가 왜?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당장은 형용할 수 없는 허탈함부터 앞섰다.
빈 집으로 남아 있을 때에도 가끔 고향 방문 기회가 있을 땐 일부러 들러 마당에 서서 묵상黙想에 잠겨본다. 비록 잡초만 무성한 마당이고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집일지라도 나의 추억어린 얼이 담겨있는 곳이고, 구석구석 생전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묻어 있던 흔적과 할머니가 홍시 따주시던 감나무, 죽순나무를 비롯해 고향의 냄새와 소릴 오감五感으로 느끼며 향수를 달랬던 곳이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현실, 즉 타향에서조차도 내 천리안으로 집과 터의 무늬를 볼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 한편으론 나를 우울하게 한다.
겨울연가
김 형진
꽁꽁 언 생소나무 등걸
군불 땐 굴뚝에 연기 자욱이 드리워
온 몸에 배는 매캐한 내음이
틈새로 데워지면 구들장
겨울은 눈 내리는 허름한 초가草家라도
아랫목 이불속 정情은 늘 따스함이 있었다.
꾀죄죄한 이불 속에 묻어 둔 밥그릇
어머니 체온體溫 같은 따뜻함으로
늘 뭉클하게 만져졌고,
바람은 귀신 소리 내며 문풍지 떠는 때
당신 앞의 호롱불도
위풍에 제 몸 가누기 힘들어 하는데,
어제 놀다 터진 내 양말 깁는
당신의 손길은 내 발이 된다.
덜석 주저앉아 아랫목에 발 내밀고
밖에 눈 내리는 줄 모르고
밤이 이슥하도록 깔깔대며
수건돌리기 하던 시절이
이토록 그리운 것은
어젯밤 내린 눈이 고향에도 내려서 일까?
하얀 눈 수북이 내리는 날 밤
신발 거꾸로 신고 숨죽이며
서리 해 먹던 하얀 장독대
항아리 속에 잡히는
김치 포기의 알싸한 맛을 못 잊는 것은
출출해진 배고픔의 보상이었다.
친구여!
어릴 적 꿈 벗어 두고 온 고향이
이토록 그리운 것은
눈 내리는 밤 아궁이에
군불 땐 아랫목에 둘러 앉아
꼬무락거리며 함께 놀던
발가락들의 따뜻함이 그리워선 가?<‘09.12.14>
언젠가는 내 마음에서 멀어져 사라지게 될 것이다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그런 현실을 맞고 보니 올 것이 왔다는 허탈감에 이제 눈을 감으면 잘 보이던 나의 천리안千里眼이 흐려져 쓸모없게 되었다.
조상 때부터 내려 온 터전과 터무니, 유산으로 간직하며 동생이던 조카든 조상의 얼이 들어있는 그 집에서 살아 주길 바란 소박한 나의 꿈이 3대를 못 견디고 터무니가 바뀌었으니 이제 눈을 감아도 고향 집이 잘 안 보이게 된 것이다.
그곳 고향에 누가 살던 피붙이를 보려는 때 나도 보모님 뵙듯 드나들며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곳으로 이어갈 것이다라고 했던 기대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제 아버지께서 형님에게 유산으로 주신 고향 집을 형수가 팔았기 때문에 아직 현상은 남아 있을지 몰라도 내 마음 속의 고향 집과 유년시절의 추억까지도 몽땅 사라졌다.
사별한 형님의 생전에는 필자의 생각과 같이 형제들 중 누구 하나 고향을 지키자고 했었고, 형님께서 살아 있다면 터와 집을 팔아먹는다는 일은 어림 반 푼도 없는 일이다. 형님은 은퇴 후 시골생활을 하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있었지만, 10년 전 갑작스런 병환으로 돌아가신 후 지금까지 빚 청산과 더불어 형수에게 생활자금 등이 필요했다고 했다.
격안관화隔岸觀火라. 강 건너 불 보듯, 무대책일 수밖에 없었다. 조카에게 상속된 재산을 형수가 팔아간다고 해도 형님댁의 일이라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누구 하나 財政的재정적 지원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형수의 처지를 이해는 하여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동생들은 하나같이 그냥 그 집이 팔려 나감으로 인해 추억의 고향집이었던 점은 고사하고 우리 동기간들의 뿌리까지 팔려 나간 것 같은 그 점에 대해 서운함이 크다고 했다.
“그렇게 갑자기 팔아 갈 것 같았으면 내라도 그곳에 내려가 살겠다고 할 걸” 하면서 제일 아쉬워하는 서울의 남동생.
이웃 마을에 시집가 살면서 이때까지 끈끈하게 친정집을 마주 보다가 “이제 바라보아도 친정집 같지 않고 어째 이상하고 서운하다.”는 이웃마을에 사는 여동생.
“이제 정말 고향을 잊고 살아야 할 것 같다.”는 서울과 대전의 여동생들이 서운해 하는 마음과 아쉬워하는 모습들.
“부모님이 살던 집을 그냥 놔두지 말고 진작 조카와 합의하여 사두지 그랬냐?”며 함께 아쉬워하는 고향친구들의 우정 어린 조언.
비록 아무도 살지 않은 빈 집이었지만, 나에게 있어 그냥 빈 집이 아니다. 처마가 땅에 닿을 정도의 허름한 초가삼간이었을지라도 그 곳에서 유년시절을 형제자매들과 함께 동근생同根生의 우애를 나누며 살았던 정든 옛집 아니던가?
이제부터 고향 아닌 고향을 두고 지내야 한다.
비록 빈집이었지만 내 안에는 아직도 거기 살고 있다고 여기면서 지내왔는데, 앞으로는 꿈속에서나 가능할까?
그 집과 그 터 속에 묻어있는 흔적들과 무늬까지 모두 지워야한다는 아쉬움과 서운함이 교차되는 생각으로 가만히 눈을 감아도 이제 정말 아무 것도 보이질 않는다.
아, 아! 빈 집도 집이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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