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수필,시

◇ 배신背信

이원아 2015. 12. 15. 10:33

◇ 배신背信

 

 

 

 

"배신은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부터 작용한다. 특히 그래서는 안 되는 친구나 부부, 연인사이 같은 가까운 사이에서의 배신이 상대적으로 크게 고통을 받기 때문에 세상살이 가운데서 상대의 마음에 가장 상처를 깊게 내는 것이요, 악행惡行 중에서도 가장 나쁜 행위인 것이다. 인생 살면서 배신자라고 하는 소릴 들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2015.7.2

 

 

요즘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대통령 간에 정치적 갈등을 두고 여야 정치권에서 연일 시끄럽다.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국무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정치적 선거 수단으로 삼아서 당선된 후에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 주셔야 할 것”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선거법 위반이라고 유권해석을 요청했다고 한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고 엎친 데 덮치는 형국이다.

  가뜩이나 작년 한 해는 세월호 참사 때문에 국민들이 실의에 빠져 있다가 겨우 헤어나려고 하는 때, 이번에는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때문에 전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어 그로 인해 경제가 살아나지 않는다고 아우성들이다.

  그런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야당은 야당대로 당내 문제로 내홍을 앓고 있고, 하물며 당․정․청까지도 원내대표의 탈퇴여부를 놓고 친박이니 비박이니 하면서 파벌 때문에 떠들어 대는 모습들이 보기 좋게 안 보인다.


  사정을 잘 모르는 필자는 정치적 이야길 하려는 것이 아니지만, 원내대표를 향해 한 쪽에서는 배신자라고 하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라고 서로 버티면서 그 고민의 정도가 원내대표가 자진 사퇴하는 방향으로 몰아가는 듯한데, 정작 본인은 명분을 찾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당동벌이黨同伐異이니 같으면 함께하고 다르면 갈라서는 게 정당의 본질이고 속성이라 해도 특히 정치권에서 배신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은 이런 현상이 당리당략에 걸맞지 않은 일부 의원들이 사욕에 의한 정치이념이 충돌되면서 당을 떠나는 행위가 많기 때문이다.


  정치를 생업으로 하면서 먹고 사는 그들이 태화위정太和爲政으로 정치를 하지 않기 때문에 국민들 눈에 보이는 것은 그냥 싸우는 추악한 모습만 보이는 것이다. 배신背信이라는 말은 어떤 대상에 대하여 믿음과 의리를 저버린다는 말로서 관계에서 서로의 신의가 깨져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상태를 말한다.


  , 당해보면, 사람 사는 사회에서 자주 일어나서는 안 되는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인륜의 극치다.

상대를 그토록 믿었던, 그로 인해서 나의 모든 걸 다 들어내 보여준 것이 오히려 독이 되거나 약점이 되어 상대는 그걸 발목 잡아 본인에게 유리하도록 행동하려 들거나 그렇게 처신하기 때문에 당하는 쪽에서는 불쾌의 정도를 넘어 배신감 때문에 죽이고 싶도록 미움이 가득 차는 것이다.

  좋은 관계로 지낼 땐 ‘너만 알고 있으라.’면서 비밀로 한 이야기가 어떤 연유로 인해 불편한 관계로 변하게 되면 상대에게 속내를 들어 내보인 자신이 자괴감에 빠지기 쉽고 그 약점 때문에 굴욕당하기도 한다.


  게 되면 배신으로 인한 배반자가 되는 것이다. 배신과 배반背反은 비슷한 말이지만, 배신은 그 행위의 결과가 눈에 보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지만 배반은 대부분 눈에 보인다는 점에서 조금 다른 말이다.


  '내청춘 내 순정을 빼앗아버리고 얄밉게 떠난 사람’을 두고 ‘사랑의 배신자’라고 한 노랫말처럼 배신의 결과가 두 사람에게 한정될 수 있지만, 배반은 배신의 생각을 가지고 완전히 돌아서버리는 행위이므로 나뿐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까지도 피해를 끼칠 우려가 다분한 것이다.


  는 친구를 사귐에 있어 무의지붕無義之朋은 불가교不可交라고 가르치고 있다. 즉 의義롭지 못한 사람은 친구로서 사귐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친구 간에는 신의信義가 아주 중요한 덕목이다. 당연한 말인지 모르겠으나 믿음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관계에서 서로 교분이 생기는 것이고, 그래야만 친구가 되어 인생 가는 길에 오랜 동반자로서의 길동무가 되는 것이다.

 

  는 막역莫逆한 친구로부터 배신을 당한 경험이 있다.

2002년 황당하게 조기 퇴직을 하고 모 단종회사의 월급쟁이 사장으로 광양에 있다가 부산에 사무실을 옮겨 일하고 있을 때, 필자의 후임 자리의 책임자로 있던 오랜 친구가 퇴직을 하면서 하필이면 당시 생계를 위해 근근부생僅僅扶生하고 있는 필자를 좀 도와주기는커녕 내 자리까지 밀고 들어오니 또 한 번의 황퇴荒退를 당해 실업자가 된 경우이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보다도 가장 친하게 지냈던 오랜 친구로부터의 배신행위에 대해 크게 실망했음은 물론 그때의 안 좋았던 감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물론 개인회사라는 게 이윤 추구가 최상의 목적이라 그를 이용하려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회사로부터도 배신당한 것 같아 아주 유감스런 감정이 남이 있다. 그 친구와는 여러 가지로 특별한 인연이 있다.


  동향同鄕이고 동년배인데다가 훈련과 교육을 함께 받고 공병단 소속으로 함께 근무한 전우의 인연으로 시작하여 한 국가기관의 직장동료로서 그와 여러 차례 함께 근무하면서 주말마다 낚시라는 취미생활을 통하여 우의를 다지며 지내는 등........,

그야말로 남다르게 지내온 사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하필이면 이 친구와 자리바꿈 시키는 회사도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도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아주 특별한 인연으로 여기며 지내 왔던 필자와 면소재만 다른 동향인으로 훈련병 시절 옆자리에서 만난 인연의 고구지우故舊之友요, 한 직장에서 30여년 가까이 허물없이 가깝게 지내던 막역지우莫逆之友이며, 함께 취미생활로 다져 진 복심지우腹心之友였는데,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해서 하루아침에 신의를 저버린 경우이니 그의 생각에 앞서 친구한테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필자 쪽에선 그를 배신자로 여기게 된 것이다.


  같으면

  "내 아무리 그렇더라도 절친을 내보내고 그 자리에 갈 순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이 친구간의 의리요 순리 같은데, 그런 생각 없이 상황이 종료되었으니 필자로선 서운하기 그지없었다. 필자로선 마땅한 호구지책糊口之策이 없어 난감했었지만, 이때 어쩔 수없이 건축사사무소를 엉겁결에 개업하고 지내고 있는 지금 생각해보면 10여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친구간의 안 좋은 추억이 되었다.


  "누가 당신을 한번 배신했다면 그 사람 탓이고, 두 번 배신했다면 당신 탓이다.”라고 엘리노어라는 사람이 말했다는 데, 이제 그도 몇 년 전에 멀리 이사를 가 살고 있어 만날 수도 없지만, SNS 등을 통한 소통도 안하고 지낼 정도니 그와는 호연好緣으로 만나 악연惡緣으로 끝나는 듯 이제 막왕막래莫往莫來의 관계가 되어 소원해졌다.


  콩 한 말과 흰콩 한 말을 썩는 데는 한 순간이지만 다시 원래대로 고르려면 한 나절이 걸려도 모자라는 것과 같이 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 이룬 오랜 친구일지라도 그것이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니, 남보다 못한 소원한 관계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을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면서 원만한 관계와 불편한 관계를 통해 얻을 것은 얻고 줄 것은 주면서 이해득실을 따지며 산다고 말할 수 있다.


  나 친구라면 의리를 저버리게 되는 행동은 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기본적인 사유이다.

사람은 독불장군이 없듯이 혼자서는 살 수가 없다. 씨앗은 흙을 만나야 싹이 트고 물고기는 물을 만나야 숨을 쉬듯이 사람은 좋은 사람을 만나 인연을 맺고 살아야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사람끼리라도 그냥 아는 사이라는 것과는 차별을 두고 친구라는 표현을 쓰고 그런 관계라고 말한다.

  친구는 사는 날까지 가족이 아닌 남으로서 곁에 두고 함께 살아 가야할 위치에 있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신의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필자의 나이도 이제 만만치 않은데 그와의 인연을 간직하지 못한 것은 내 인생 소사小史에서 오점을 남긴 부분이다.


  친구 이야기가 나왔으니 지인이 보내 준 카카오톡의 한 스토리가 의미 있게 읽은 내용을 소개한다.

『어느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가 형제 같이 지내던 고령의 친구가 있었는데, 죽기 한 시간 전에 “친구야! 나 먼저 간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죽었는데, 전활 받은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않은 채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이 아버지는 그 말 속에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도 들어 있었을 것이고,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도 들어 있었겠지만, 곧 운명할 친구가 떠나는 그 순간에 나를 찾을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 고맙고 그런 친구를 먼저 보내는 것에 대해 슬퍼 눈물만 흘렸던 것이다.


  위 용이 좋아 나도 퍼 날랐더니 잘 아는 어느 여자 분이,

“요즘은 나 죽는다하고 카톡으로 한 방에 퍼트리면 되겠네요. ㅋㅋ”

카친이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많은 친구가 있는 것도 좋지만, 농담 같은 신시대의 발상이라고 가볍게 넘겼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는 여기서 죽음에 임박해서까지 그런 친구 하나 쯤은 있어야 내 삶이 외롭지 않을 것이라는 평범한 삶의 진리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교우이신交友以信이니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는 신의로써 사귀어야 한다.

지금까지 나와 함께 살아왔던 사람, 앞으로도 오랫동안 내 곁을 지켜줄 사람이 가족 외엔 친구뿐이다.

수심가지인심난측水深可知人心難測이라고 했다.


인간의 마음은 한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은 알 수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돌부처의 마음도 변화하는 세상인데 사람의 마음은 주변 환경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바뀔 수가 있다.

한번 믿음과 의리를 배신했다고 해서 아주 나쁜 사람으로 치부하기는 뭣하지만, 자신의 실수를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은 한번 배신했다고 해도 그걸 나중에 은혜로 보답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성 자체가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라면 한번 배신하고 두 번 배신할 때는 더 쉽게 배신을 하게 된다.

배신은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부터 작용한다. 특히 그래서는 안 되는 친구나 부부, 연인사이 같은 가까운 사이에서의 배신이 상대적으로 크게 고통을 받기 때문에 세상살이 가운데서 상대의 마음에 가장 상처를 깊게 내는 것이요, 악행惡行 중에서도 가장 나쁜 행위인 것이다. 인생 살면서 배신자라고 하는 소릴 들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