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시모노세키)문학기행
(조선통신사행렬 참관하고)
“인생을 즐겁게 보내려면 여행을 자주 다니란 말은 정말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을 떠나보면 알게 된다. 나 자신이 늘 알고 있는 곳에서 보고 듣는 것이 아닌 다른 위치, 더구나 외국여행에서 관점을 자유롭게 옮겨가며 대상을 다양하게 만나는 즐거움은 곧 고정관념을 벗어나 편견으로부터 자신을 일깨우는 한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2015.09.05
<시모노세키항구 전경>>
필자가 속해있는 부산가산문학협회원 18명과 함께하는 문학기행으로서 문인들과 해외로 떠나기는 처음인 여행이라 출발부터 기대가 되었다.
필자는 오래 전 오사카, 대마도 2회, 기타규슈 등 여러 차례 공․사적으로 다녀온 바는 있었지만, 이번처럼 문인들과 함께 여행하기는 처음 있는 일이다. 해외여행은 정말 재미난 책을 읽으러 가는 마음이다.
이번에 가는 곳에서는 또 어떤 재미나고 흥미 있는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있으며, 그 나라 사람들의 삶은 어떤지를 면면히 볼 수 있을까하는 마음이 기대되는 것이다.
시모노세키를 간략하게 요약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국 혼슈와 규슈 사이의 시모노세키 해협에 자리 잡은 전략적 어업요충지로서 예전에는 아카마가세키(赤間關) 또는 바칸(馬關繭)이라 불렸다고 한다.
1905년 지금의 기타큐슈(北九州)인 모지(門司) 사이에 철도 및 연락선이 개통되면서 현대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곳이며, 같은 해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잇는 부관(釜關) 연락선 항로가 개설되어 일본의 한국 침략의 교두보가 된 곳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와는 아주 긴밀한 역사성을 가진 곳이다.
특히 이번 문학기행은 우리나라 부산광역시와 자매결연 도시이기도 한 시모노세키에서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행렬을 참관하기로 계획되어 있기 때문에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조선시대와 일본의 에도시대에 조선에서 파견된 외교사절을 조선통신사라고 하는데, ‘통신通信이란 신뢰를 나눈다.’는 의미라고 한다.
즉 조선통신사를 통한 양국의 교류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 조선과 일본의 평화와 선린우호를 상징하는 국가적 행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무슨 짐 꾸러민지 마트 앞에 수북하게 쌓아 놓은 박스들을 택시에 싣고 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하니 우리보다 일찍 나온 다른 회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어 인사를 나누고는 터미널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필자의 마음은 이 건물을 짓던 당시가 회상되며 남다른 감회가 들었다.
70년대 초, 당시 건축 필수요원으로 공직에 몸담고 있을 때 최초로 IBRD차관자금을 들여와 부산항의 부두시설을 현대화하는 정부 핵심사업 중 지금의 현대식 터미널건물을 설계부터 완공까지 참여 했던 기억이 새로워졌다.
당시 짧은 영어실력으로 영문으로 된 설계도서를 익히느라 마음고생이 컷 던 일, 남들보다 1시간 전에 현장에 출근해야 했던 어려움. 감독하면서 외국의 엔지니어들과의 서투른 영어로 의사소통했던 일. VIP들이 현장 방문 시마다 8각 경사지붕을 한 새로운 모습으로 디자인된 지금의 건물에 대해 일일이 설명했던 일 등등.
정부 감독을 대신해 칼 같이 철저하게 감리를 해주던 수석 엔지니어와 그가 속한 미국 용역사(Lyon Associates.)의 외국기술자들과 현대건설 건축기술자들 등 현장을 누비던 모습들이 주마간산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제 이 터미널건물도 30여 년을 사용한 건물이기 때문에 시대에 맞지 않아 9월 초부터는 부산항재개발 차원에서 중앙부두에 현대적 감각으로 신축된 건물로 옮겨 간다고 하니 필자로서는 남다른 감회가 들었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결국 이번 여행에서 돌아오면 처음부터 끝까지 이 터미널을 이용한 셈이 된다고 생각하니 무슨 미련 같은 것이 생각나 다시 보였다.
작년 세월호 참사 이후 승선 절차가 까다롭게 이뤄진 가운데, 들뜬 마음으로 배에 올라 2등 객실 지정실에 여장을 풀어 놓고는 처음 만나는 일행들과 인사를 나누고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저녁식사를 하라는 선내 방송이 나왔다.
안내에 따라 우르르 식당에 몰려가니 원탁으로 된 예약석에서 우리 일행을 맞이하고 있었다.
늦은 저녁이니 식탁에 가지런히 놓인 상차림이 먼저 눈에 들어 왔다.
이 회의 회장(정훈교, 시인)께서 각자 짐 꾸러미에 몇 병씩 넣어 가지고 온 소주를 꺼내 돌려가며 일행들과 반주를 나무며 환담을 하는 가운데, 새로 소개 받은 몇 몇 처음 보는 사람들도 마치 오래 전부터 아는 지인처럼 금방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변했다.
식사는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시간차를 두고 예약순서대로 준비된다고 하니 복잡하지 않아 조용한 가운데 선내 식을 할 수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부산항 시 내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소리가 들리고 그들 만의 정겨운 대화 속에 웃음소리가 들려오니 여행은 출발부터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첫날밤을 자고나면 내일 이른 아침 목적지인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하면서 우리들의 신나는 여행이 될 것임을 꿈꾸며 잠이 들었다.
8월 22일(토), 첫째 날.
아침식사를 하는 중에 작년에 이미 다녀왔던 정 회장으로부터 오늘 여행 스케줄에 대해 설명을 하는 중에 배는 항구에 서서히 칸몬(關門)해협을 따라 들어서는데, 시내 한 가운데 우뚝 선 타워부터 눈에 들어 왔다. 하선 절차는 일본 세관원이 출근하면서 부터 시작 되었다.
농수산식품등과 위험물만 소지 않았으면 쉽게 통관 시켜 주었는데, 필자는 울 회장이 술 욕심 부리고 필요이상으로 많이 가지고 온 짐 속의 소주가 문제 될까봐 조심스러웠지만 세관원은 별 신경 안 쓰고 통과시켜주어 한 숨 놓았다. 도시가 너무 깨끗하다는 인상을 갖고 대기 중인 버스에 오르니 일본인 특유의 운전기사가 우릴 반겨 맞는다.
카이코유메(海峽夢) 타워
높이 143M로 이 곳에 오르면 시모 노세키 전 도시를 360〫 로 볼 수 있 어서 도시의 대략적인 규모를 알 수 있게 건립된 철골조 탑으로서 마치 부산의 명소인 용두산공원에 있는 부산타워(약 120m)를 연상케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부산타워와 이 유메타워를 비교해 놓고 자매도시임을 안내하는 그림도 붙어 있었다.
키 작은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대충 파악한 우리 일행들은 포토 존에 들어가 인증사진을 찍고 내려왔다. 주차장까지 따라 나와 우릴 배웅하며 안내하던 일본 여성은 서울 어느 어학당에서 3개월 정도 한국말을 익혔다 하는데 놀랍게도 우리말을 너무 잘해 호감이 가는 여성이었다.
더욱이 경북 상주가 고향인 재일 한국청년과 결혼까지 하려고 한다는 부분에 가서는 우리 모두는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그녀의 행운을 빌었다.
조선통신사상륙기념비. 자매공원
이 기념비에는 당시 한일의원연맹회장인 김종필씨가 건립취지문에 대표로 서명되어 있었다.
여기 아카마가세키는 조선통신사 일행의 일본 본토 최초의 상륙지였으며 1607년의 제1회로부터 1764년의 제11회(마지막이었던 제12회 째는 쓰시마까지로 본토 미 상륙)까지 항상 방문하였으며 귀로에도 들렸던 주요한 경유지라고 한다.
필자는 슬슬 걸어가며 시내 구경을 하는 주에 작은 무대 앞에 모여 있는 곳을 들르니 어린이부터 노인층까지 남여가 아우르며 일본 특유의 민속춤(요사코이よさこい 춤)을 추고 있었는데, 아직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깃발을 흔들며 색색의 전통복장을 한 그들이 열광적으로 춰대는 춤사위를 관람하는 틈에 끼어 한동안 앉아 관람하니 그들의 전통문화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아카마(赤間) 신궁神宮
궁내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기념사진을 찍고 나오다 보니 소나무 가지가 약 10m나 됨 직하게 횡으로 곧게 뻗어가며 자라고 있는 모습이 아주 특이했다.
카라토(唐戶)시장
안내에 따라 시장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어디서 그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식사할 수 있는 메뉴를 고르는 인파들로 꽉 차있었다.
이 시장은 시모노세키는 물론, 해협 건너편 기타큐슈의 요리전문가들도 찾아오는 해산물 도소매시장으로서 안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복어모형이 눈에 먼저 들어오는 느낌으로 봐서 복어가 특산물임을 알 수 있었다.
부산의 자갈치시장보다 그 규모 면에서 큰 그런 유의 해산물 전용시장이다.
어항답게 인근 바다에서 갓 잡은 복어, 새우, 등 각종 싱싱한 재료로 만든 다양한 요리들을 맛 볼 수 있는 시장인데, 점심시간에는 장내의 즐비한 포장마차에서 즉석으로 만든 요리를 사들고 적당한 장소에 앉거나 심지어는 서서라도 시모노세키의 생선 맛을 즐길 수 있는 그런 특이한 시장이었다.
필자는 이 지방에서 유명한 복어튀김 요리와 한국에서도 낯익은 초밥 몇 점을 사들고 적당한 장소에 앉아 먹으니 마치 한국의 노점 포장마차에서 먹는 그런 맛이었다.
다른 나라이니 신경 쓰일 필요 없이 일행들과 어울려 낯선 시장 바닥에서 마시는 소주 맛이란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
물론 가족들과 함께 온 현지인들도 모두 그런 자리에서 우리처럼 그렇게 점심을 먹고 있어서 어색하진 않았지만, 한국 사람들처럼 대낮에 그렇게 낯 술을 즐겨 마시지 않는 것 같아 일본 사람들이 우릴 보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조선통신사행렬 재현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은 2004년부터 당시 (사)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와 시모노세키시의 공동주최로 바칸축제 행사 기간 내에 개최되었으며, 현재는 (재)부산문화재단 국제문화교류팀에서 지속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일 양국이 참여하는 우호의 행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중간 쯤 서서 행사 본부석을 향해 보고 있으니 부산에서 우리 문학회원들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온 200여 명의 참가자들과 자매시인 부산광역시 고위 공무원, 경상남도 관계자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곧이어 이 행사를 알리는 테이프 절단이 끝나면서 행렬이 시작되었다.
잠시 조선통신사행렬을 소개하자면, 당시 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館의 삼사三使를 비롯하여 화원画員·의원医院·역관駅官·악사樂士등 총 400명에서 500명에 이르는 대 사절단이 조선의 수도 한양漢陽을 출발하여 부산, 대마도, 오사카 또는 시모노세키와 교토를 거처 일본의 수도인 에도(江戸)까지 반년 이상이 소요되는 왕복 약 3,000㎞의 국가적 큰 행사였는데, 긴 여로의 곳곳에서 통신사는 일본의 많은 문인들과 필담을 나누고 노래와 술잔을 주고받으며 문물을 전했다고 한다.
조선통신사의 선단船團과 행렬은 일본의 민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일본 각 계층의 사람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니 일본으로서는 융숭한 대접을 하면서까지 이 통신사들을 극진히 모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긴 행렬을 따라 촬영을 하면서 생각하니 훈도시를 찬 키 작은 일본 가마꾼들과 그들에 의해 가마에 탄 조선의 관리들의 모습들이 오버랩 되면서 그 후손이라는 자존감이 생겨나 옛날로 돌아간 듯 가슴 뿌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 행렬은 저녁 10시 경 가장 크게 치러지는 바칸마쓰리(馬關まつり) 축제 중에 조선통신사행렬이 그 일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남는 시간이 있어 주안을 겸한 저녁을 푸짐하게 먹고 시모노세키역 광장에 들러 축제 시간을 기다렸다.
8월 23일(일), 둘째 날.
아침은 호텔식이었다. 이곳에서 먼 곳까지 가서 난조인(南藏院)의 와불臥佛 구경을 하고 나면 점심시간이 좀 지날 것이다라는 안내에 따라 아침 식사를 배불리 먹었다.
차창 밖 칸몬해협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면서 800여 미터 길이의 칸몬대교를 지나 고속도로에 올랐다. 난조인은 후쿠오카 현에 있기 때문에 거기까지 가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일본의 고속도로 통행료가 매우 비싸다는 점에 놀랐으나 주말인데도 우리나라와 같이 통행량이 많지 않은 점도 특이했지만 울창한 자연림이 가득한 일본의 고속도 주변은 정말 아름다웠다.
난조인(南藏院) 세계최대 와불상
한적한 시골마을에 도착하여 조금 걸어 올라갔다.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범상치 않았는데, 보통의 사찰에서 볼 수 없는 20여 미터 됨 직한 터널을 지나니 파란색의 거대한 불상이 머리를 괴고 누워있는 모습이 압도적인 크기로 눈에 들어왔다.
남장원은 일본 불교 성지 고야산 진언종의 규슈지역 본산으로 동양 최대 와불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청동이라 그런지 자연스럽게 녹이 쓸어 파란 색을 띤 조각상은 마치 거인이 누워있는 것처럼 불상의 모습을 보니 자연스럽고 인자하게 미소 짓는 모습에서 꼭 불자가 아니더라도 그 크기와는 별개로 우리 같은 여행객까지도 포근한 어머니 마음처럼 다 포용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일행은 여기에서 단체로 인증 사진을 찍었다.
필자는 불상의 크기를 가늠해 보기 위해 뒤로 돌아보다 두 발가락 부분이 누런색으로 칠이 벗겨진 곳을 보게 되었는데, 그 부분이 벗겨진 것은 이곳을 만지면 누구나 행운이 온다는 속설 때문에 참배객이나 관광객들이 자꾸 만져서 그렇다고 하니 인간들의 바람이 어디까지일까?
다음 행선지는 고쿠라성과 정원, 마쓰모토세이초 문학관인데, 점심때가 되어 먼저 단카(旦過)재래시장에서 시장 구경을 하고 적당한 곳을 찾아 현지 식으로 하겠다는 안내에 따라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단카(旦過)재래시장
이 재래시장의 규모가 굉장히 크게 보였고, 최근에 가로 위에 지붕을 씌우고 냉방과 조명시설을 하는 등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한 듯이 보였다.
골목을 따라 아이쇼핑을 하는데, 일행들은 뭐 별로 사고 싶은 욕망이 드는 물건들이 없는지 그냥 슬슬 산책하듯 시장 곳곳을 둘러보고는 시장 안에서 꽤 이름 있는 일본식 우동집으로 들어가 면류의 식사를 했는데, 이 식당은 제법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방식대로 조용히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며칠 째 외식만 하고 다녀서 인지 싱싱한 과일이 제일 먹고 싶었다.
먹는 즐거움도 여행의 맛이다. 여기서부터 고쿠라성까지는 제법 걸어가야 한다.
날씨도 더운데 걷는 시간이 많으니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눈치였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시장 골목을 나오다 필자는 총무에게 졸랐다.
“가다 어디 적당한 곳에서 먹을 수 있게 수박이나 과일 좀 사주세요.”
“누가 그 무거운 걸 들고 가려고요?”
“들고 가는 건 내가 할 테니 사 주기나 하세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행들이 이구동성으로 과일 좀 사자고 해서 많지도 않은 과일 종류를 진열해 놓고 있는 채소 가게에 들어가 수박 두 덩이를 사 들었다. 우리의 수박과 같은 모양인데 그 크기와 모양도 신선하지 않았지만 맛이 궁금하기도 해 얼른 어디 앉아 먹고 싶었다.
둘이서 하나씩 나눠들고 얼마를 걸어가자니 무겁기도 하고, 조금 덥기도 했지만 가는 길 나무 밑 벤치에 앉아 쉬엄쉬엄 쉬면서 성을 찾아 걸어갔다.
고쿠라성(小倉城)과 정원庭園
이 성은 큐스시립박물관 맞은편에 있었는데 정확한 위치는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고쿠라키타구에 있는 제곽식 평성으로 1602년에 호소가와타다오키가 세운 성이라고 한다.
창설 당시는 웅장한 자태를 내뿜었지만 안타깝게도 2번의 화재로 전소 돼 버렸고 지금의 모습은 1959년에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석축을 80도 정도 경사를 두어 쌓 는 일본 고성의 담장 축조 기술이 아직 남아 있는 높은 담장을 돌아들어가니 입구부터가 특이했다.
고목들이 우거진 사이로 난 진입로는 지그재그로 걸어 올라가는 모양인데, 이는 성이 직접 침략 받지 못하도록 건설당시부터 그렇게 의도적으로 된 길이라고 한다.
우리 일행은 그늘 속을 천천히 걸으며 올라가니 오래 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보초를 서듯 서있고, 잘 정돈된 정원 속에 성의 윤곽이 보였지만, 관람하는 사람들은 현지인 몇 명하고 우리 일행들뿐이었다.
우리 일행들은 나무 그늘 밑에 있는 벤치로 우르르 몰려가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수박부터 먹어 치우자고 했다.
우리 회의 총무는 변변치 않은 조그만 칼로 수박을 자르느라 고생은 했지만 간만에 일본 수박을 한 조각씩 들고 아이들처럼 맛있게 먹는 회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다.
낯설지만 하나도 부담스럽지 않는 장소에서 갖는 수박파티는 한국의 어느 공원에서 먹는 그런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우릴 보는 일본 현지인들이 보는 우리들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가 궁금했다.
1층부터 3층까지는 즐기면서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전시 시설이 있고, 4층은 시민 갤러리여서 그냥 둘러보는 수준으로 어슬렁거리며 5층으로 올라가니 규슈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가 있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시내는 한마디로 조용하고 깨끗해 보였고 뒤로는 오래 된 정원이 잘 정리된 고쿠라성 정원의 모습이 보였다.
원래는 들어가 보기로 했지만 이곳 전망대에서 한 눈에 다 보이니 그냥 내려다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마쓰모토세이초 문학관으로 향했다.
마쓰모토세이초(松本清張) 문학관
건물 규모가 크고 그 의 평생의 발자취와 문학적 평가 등 모든 자료가 일목요원하게 정리 전시되어 있었고, 시민들도 그곳에 들러 문학적인 학습과 교육 등을 통해 그의 문학사상을 배워 갈 수 있도록 하는 공간도 있었다.
그는 일본의 대표적 추리소설 작가로서 그와 관련된 문학과 비평을 통해 일본 문학사에 길이 남을 정도의 훌륭한 문학가였지만, 일일이 다 읽어보고 할 시간이 없어서 우리 일행들은 그냥 설명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고, 문학기행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기념사진으로 족적을 남기고 돌아왔다.
다시 시모노세키로 돌아와 저녁 7시경부터 시작되는 바칸마츠리축제를 구경해야 하기 때문에 처음 도착지로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고 다소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시모노세키 역 광장으로 나갔다.
시모노세키역 광장
시모노세키 시는 일본에 서 인구 30만 정도의 작은 소도시이므로 뱅뱅 돌아봐도 맨날 유메타워를 중심으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역으로 가는 길에는 우리나라의 여느 축제장처럼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했고, 사람들과 포장마차가 뒤 엉켜 길 전체가 복잡하고 소란스러웠다.
역 광장에서는 젊은 가수들이 나와 계속되는 노래와 춤을 보기 위한 시민들로 꽉 들어찬 가운데 우리 일행들은 구경하는 시민들 속에 어울려 기모노 복장을 한 소녀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찍어 주는 등 그들의 축제의 한 사람으로서 즐기며 시간을 보내며 바칸마츠리 축제시간을 기다렸다.
바칸(馬關)마쓰리まつり(축제)
1978년 전 시민이 참가하는 「바칸축제」로 명명되어 매년 8월 하순의 토·일요일 여름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시민축제로 자리 매김하게 된 이 축제는 시모노세키 지역 주민들의 연대와 결속에 의한 지역주민들로부터 교통과 지역 활성화를 통한 밝고 풍요로운 지역 만들기를 목적으로 개최된다고 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온갖 조명들이 환하게 밝혀진 가운데 축제 행렬이 막 진행되고 있는 곳으로 몰려갔다.
인파가 많으니 6명 씩 3조를 짜 서로 길을 잊지 않도록 하여 복잡한 도로 변 인파들 속에 자유롭게 끼어 관람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각양각색의 전통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공공기관은 물론 지역 문화, 사회단체, 학교 등 그들의 속한 피켓과 일본 특유의 커다란 깃발 흔들며 춤을 춰가면서 줄 지여 행진을 하는 모습이 여타의 축제와는 사뭇 달라보였다.
아주 간단한 동작, 즉 두발 전진하다 한 발 후퇴하면서 중간에 박수를 치는 등 같은 박자와 리듬에 맞춰 춤추고 노래하며 왕복 8차선 도로를 따라 빙빙 돌면서 행진하는 일종의 가두시위 하는 듯 했지만 춤이나 음악은 그야말로 일본풍의 냄새가 물씬 풍겨났다.
필자도 연금세대라 그런지 그 많은 단체 중에서도 일본의 연금수급자들이 피켓을 힘겹게 든 노인들의 모습이 인상 깊게 보였다.
한참을 서서 구경하고 있으니 조금은 지루하기도 해 늦은 시각이 되어서 돌아오면서 처음 올라봤던 유메타워의 조명이 휘황한 야간모습을 처다 보며 숙소로 돌아오니 이번 여행의 대미를 장식한 것이다.
호텔 로비에서 맥주 몇 잔으로 피로를 풀고 내일 일정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드니 키 작은 일본인들이 열정적으로 같은 동작을 하면서 행진하는 그 무리의 인상이 자꾸만 머리에 영상으로 남는다.
8월 24일(월), 셋째 날.
오늘은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가는 곳마다 이국적인 모습이지만, 중국의 풍물이나 관광명소처럼 볼 것들이 그렇게 신비하거나 기이한 관광명소는 없었어도 시간만은 빠르게 흘러가는 걸 보면 어쨌든 이틀 동안 재미있게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칸몬(關門)해협과 해저터널, 히노야마(火の山) 전망대
800m의 거리가 되는 칸몬대교 를 버스를 타고 건너서 거기서 다 시 해저의 인도터널을 도보로 걸 어보고 전망대에 올라 이 해협의 경치를 내려다보는 코스부터 시작되었다.
해저인도터널은 1958년에 개통되었고, 혼슈와 큐슈를 잇는 보행자용 해저터널로 시모노세키 시와 모지 시 사이가 전장 3,461m(인도부분 780m)의 해저터널로 연결돼 있어 해협을 걸어서 횡단할 수 있는 세계적으로 유일한 해저터널로서 도보로 약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안내판에는 일본어, 한국어, 영어 순으로 이 터널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이곳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들르는 곳임에는 틀림없는 명소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통영에도 일제 강점기에 건설 된 길이 480여 m의 해저터널이 있고, 최근 최신공법으로 건설된 가덕도 침매터널도 있어 돌아 본적도 있지만 해저를 걸어간다는 느낌밖에는 별 볼거리는 없었으므로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보는 터널은 심플한 해저 구조로 되어 있었고, 중앙선을 그어 놓고 지역을 표시해 놓았으며 통행료는 도보에 한해서 요금이 면제 되어있었다.
히노야마 전망대를 오르기 전 도보로 걸어 온 해협을 나와 보는 칸몬해협과 대교의 아름다운 조화는 일품이었다.
산 정상 전망대에는 회전 레스토랑, 기념품 매점을 갖추고 있어서 일행들은 아이스크림을 사서 하나씩 입에 물고 내려다 보이는 칸몬해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주간에는 칸몬교를 배경으로 한 크고 작은 선박들의 유유한 항해모습을 내려다보는 것도 아름답지만 특히 야간에는 ‘1000만 달러의 야경’으로 불리는 아름다운 밤풍경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쵸후(張府) 모리저택, 코잔지(功山寺), 사무라이저택
모리저택은 메이지 36년(1903) 쵸후 모리 가문의 14대 손인 모토토씨에 의해 세워진 저택으로 메이지 천황도 숙박을 했을 만큼 품위 있는 안채와 흰 벽으로 둘러싸인 일본식 정원은 당시의 시대상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의 냇물정도 밖에 안 되는 강을 따라 산책하거나 길모퉁이 를 돌면서 거리를 둘러보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도 있다.
모리주택은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들어가 보니 내실만 공개하고 더 보려고 하면 입장료를 낸다 하기에 겉모습만 보고 와서 일본식 저택 내부를 다 보지 못한 점은 건축을 공부하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다소 아쉬웠다.
사무라이 저택은 당시 무사들의 회의 장면을 영상으로 공개하고 있는 점이 특이 했고 그들이 사용했던 도검류, 복장 등이 전시되어 있어 눈으로 훑어보는 정도로 관람하고 가까이 있는 공산사로 발길을 돌렸다.
코잔지(공산사功山寺)
이 절은 1327년 건조된 중국식 불전, 일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젠데라양식의 사찰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곳으로서 수많은 일본역사의 무대가 되어 왔으며, 일본이
경내에는 말 위에 탄 모습인 신사쿠의 동상이 있는 모습이 특이한 점이고, 이 절 옆으로 돌아가니 이 지역 무사들의 집단 묘소가 계파별로 잘 정리되어있던 모습이 특이했다. 이제 관광은 모든 일정을 소화했다. 점심을 먹고 자유 시간 때는 쇼핑 등 시내 관광을 조금 더 하고 저녁에 출발하는 배에 오르면 된다.
제15호 태풍 ‘고니’의 시샘
버스기사는 오후 2시경이 되어 쵸후에 있는 스시전문 뷔페에 우리 일행을 내려놓았다.
이곳에서는 한국관광객들이 벌써 식사를 끝내고 돌아가고 있는 걸 보면 주요 점심식사 코스인 듯 했다.
일본여행에서의 마지막 식사이니 배불리 잘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예약석에 자릴 잡고 앉아 스시 한 접실 막 먹으려고 하는 참이었다.
심각한 톤으로 전화를 받던 총무국장이 일본으로 북상하고 있는 제 15호 태풍 ‘고니’의 영향으로 배가 출항하지 못한다는 터미널 관계자의 연락을 받고는 걱정스럽게 말하며 일행의 눈치를 살핀다.
더구나 그냥 못가는 것이 아니라 최소 이틀이상은 출항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인솔하는 회장은 물론이고 일행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외국 여행 중에 교통편이 불안하면 여행의 기분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심술부리는 기상의 악화로 인해 우린 갑자기 당하는 황당한 사건 아닌 현실이었다.
배불리 식사를 해야 하는 판에 좋지 않은 소식은 밥맛과 입맛을 순간적으로 빼앗아 갔다.
이번 여행의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자축하려고 막 따른 맥주의 맛도 김 샌 듯 필자의 입맛에는 그저 그랬다. 이제부터 부산으로 돌아가야 할 문제가 다급한 것이다.
심술부리는 듯 하늘이 하는 일로 인해 배편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하는 일 없이 이틀씩이나 여기 머물려 있어야 할 명분이 없기 때문에 빠른 길을 모색해야 했다.
궁즉통야窮卽通也라. 궁하면 통한다고 일행 중 한 분이 서울의 자부子婦를 통해 여기 저기 수소문하여 부산행 저녁 7시 40분의 KAL 항권권이 몇 좌석 있음을 확인하니 결국 후쿠오카로 서둘러 가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어쩔 수 없이 선임船賃은 환불받고, 대신 25만 원 정도의 항공운임을 감수하고 물어야 했다.
보딩 때까지는 시간적으로 조금 여유가 있었지만 예약을 4시까지 완료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취소된다고 하니 마음을 놓을 수 없어서 대충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불안한 마음으로 추가요금을 주기로 하고 서둘러 다시 버스에 올랐다.
후쿠오카공항은 여기서부터 고속도로로 1시간 40여 분을 달려가야 하는 거리다.
비행기는 오늘 저녁까지는 운항하기 때문에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공항관계자와 전화로 예약을 확인하고 요금도 결제하고 나니 간신히 마음이 놓였다.
태풍이 오기 전에 배에서 불편하게 자지 않고 편하게 비행기로 일찍 돌아간다는 점에서는 다행이었지만, 6시부터 발권이 시작되기 때문에 좀 이른 시각이지만 공항으로 가서 상황을 알고 싶었다.
공항에 도착하여 버스기사와 정산을 마치고 대합실로 들어오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승객들이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리 일행들은 잠시 불안했던 마음을 진정시키고 대합실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그런데 이제 30여 분만 날아가면 부산공항에 도착할 것으로 생각하던 차에 또 이상한 일이 벌어 졌다.
발권 시각이 되어 줄지어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항공사 직원인 듯한 사람이 발권을 중지시키고는 우릴 향해 컴퓨터 오류로 인해 13명의 승객을 더 받아서 그런다고 설명하더니, 우리 중 13명의 좌석을 좀 양보하라는 것이었다.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날벼락 같은 소린가? 이 상황에서 누가 양보하고가 어디 있겠는가?
어떻게 확보한 항공권인데, 내 놓으라니? 아무도 대답을 않자 상황을 직시한 그는 슬슬 조건을 붙여가며 회유해왔다. 발권이 매끄럽게 끝나는 줄 알았다가 기상악화로 인해 본의 아니게 부산을 떨어야 했던 점은 아마 오래 기억되는 안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일행 중 회장을 비롯한 12명은 결국 KAL측의 옵션을 받아들여 인천행 비행기로 가기로 하고, 내일 정상근무나 주요 약속 등이 잡혀 있는 필자와 나머지 일행들은 7시 40분 부산행 비행기로 서로 나뉘어 먼저 귀국하니 태풍으로 인한 두려움 없이 무사히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런 점은 그렇더라도 통역으로 함께한 양 모씨와 호흡이 잘 맞지 않아 결국 껄끄러운 관계로 헤어진 일과 다함께 여객선으로 돌아오지 못해 부산에서 조촐하게나마 해단식을 갖지 못하고 헤어진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에필로그
세계 다른 나라 사람들이 말하길, ‘일본을 가장 우습게 보는 유일한 나라, 대한민국’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깝지만 먼 나라’로 여기고 모든 면에서 가깝게 지내고 있지 않는 일본 중 시모노세키 소도시로의 문학기행.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고 칭찬을 하는 건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지만, 짧은 일정으로 시모노세키 한 도시의 풍물과 유적 그리고 그 곳의 축제문화를 보고 듣고 한 느낌은 분명이 있으니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를 각자 자신의 문학 장르에서 작품으로 나올 것이다.
나름대로 여행의 재미도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지역을 강타한 태풍으로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컸다고 전해졌다.
우리 일행은 비싼 항공료를 지불하고 안전한 여행을 했으니 그 값은 치룬 셈이 되었다.
이번 여행에서 필자가 느낀 점은 풍물이나 관광으로 말하자면 신비함 그리고 놀라울 정도의 그 어떤 명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외국이라는 큰 거부감이나 불편함이 없이 보고 느끼며 한 수 배울 수는 있었다고 자평하고 싶다. 특히 일본은 지진이나 화산, 태풍 같은 자연재해의 위험만 적다면 세계의 파라다이스란 점이다.
산과 바다 도시 등 어디랄 것 없이 자연환경이 너무나 아름답고 깨끗해 그걸 잘 보존하고 관리하고 있었다. 잘 아는바와 같이 ‘일본인들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세계에서 제일이다.’는 것은 이 소도시에서도 필자의 눈에 여실하게 보였다.
어느 도로를 지나던 갓길에 세워 둔 자동차가 없어서 그것으로부터 교통 흐름을 방해 받지 않는다는 점은 특히 우리가 배워야 할 교통문화다.
남이 보기에 더럽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쓰레기통은 어디서건 건물 밖에서 안 보이도록 집안의 한 쪽에 뒀다.
길을 걷다보면 가장 눈에 거슬리는 것이 담배꽁초나 휴지 등 오물을 도로에 버려져있는 것인데, 이번 여행길 어디서건 도로에 어느 것 하나 눈으로 볼 수 없이 깨끗했다.
전에 여러 번 일본의 대도시에 가봤을 때도 느낀 점이지만 보도 불럭 어느 한 곳이라도 울퉁불퉁하거나 이 빠진 것처럼 어디 부서진 곳 없이 반듯하게 깔려 있는 모양이 정말 우리완 너무 다르니 우리 기능공들이 꼭 배워야 할 기술이었다.
요즘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으나 몇 년 전 대마도에 갔을 때 집집마다 꽃을 가꾸어 집 밖에 내놓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선술집 입구에 ‘한국인사절’이라는 종이쪽지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또 의아했었다. 이곳 시모노세키에서는 그래도 한국인들이 조용하게 왔다가는 지 그런 문구는 보이지 않았다.
인생을 즐겁게 보내려면 여행을 자주 다니란 말은 정말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을 떠나보면 알게 된다.
나 자신이 늘 알고 있는 곳에서 보고 듣는 것이 아닌 다른 위치, 더구나 외국여행에서 관점을 자유롭게 옮겨가며 대상을 다양하게 만나는 즐거움은 곧 고정관념을 벗어나 편견으로부터 자신을 일깨우는 한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처럼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마음 맞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려 외국 문화여행을 또 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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