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터무니없는 삶 <이로재/대표 건축가 승효상의 강의를 듣고> 북의 도발로 섬이 불타고 있다.
“<장소의 특성을 시각화視覺化하는 우리의 건축행위建築行爲>는 그 장구한 역사를 체험해 온 땅이 새롭게 요구하는 말을 경청하는 것으로 시작하여야 하고, 온갖 예의를 갖추어 그 경이로운 언어를 들추어내 깊이 사유思惟하며 새로운 시어詩語를 그 위에 겸손히 지어 덧대는 일이 건축이다.” 2010.12.03
‘터무니’의 사전적 의미는 터를 잡은 자 취. 또는 근거라고 되 어있다. 또 자취는 어 떤 것이 남기고 간 흔 적痕迹이나 어떤 일이 행해졌거나 또는 존재했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를 뜻한다고 되어있다. 그래서 ‘터무니없다’라는 말은 사물의 근거가 없다. 이치·도리·조리에 맞지 않다는 말로 쓰인다.
‘터무니’라는 말은 터에 새겨진 무늬에서 생겨난 말이라니 참으로 경이로운 발상에서 생겨난 말로서 터에 어떤 것이 남겨진 땅의 지문地文과도 같은 말이다. 적어도 우리 선조들의 생각은 터에 근거한 삶을 살아왔다. ‘천지인天地人’ 사상은 그야말로 뿌리 깊은 땅에 대한 주관이며 철학을 갖고 있어서 우리 민족은 도처에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땅에 뿌릴 박고 삶을 영위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터에 대한 애착이 어느 민족보다도 많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며칠 전 연평도에 북한의 도발로 인해 갑자기 삶의 터전을 잃고 인천의 모 찜질방에서 피난민 생활을 하고 있는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 곳에 뿌리를 박고 그려왔던 터의 무늬가 한 순간 사라진 것 같아 어처구니없는 일로 인해 터무니없는 생활을 하고 있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터에는 많은 사람들이 흔적을 남긴 과거의 기억이 손금과 지문指紋처럼 남아 있다. 우리 사람들에게 각자의 서로 다른 지문이 있듯이 모든 땅도 고유한 무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지문地文은 더러는 자연의 세월이 만든 것일 수도 있을 것이고 더러는 그 위에 우리 인간들이 덧칠해져 만들어진 무늬도 있을 것이다. 그 흔적들은 무늬가 되어 역사적인 사실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가문의 전통일 수도 있으며 전설 속의 소재로 남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무언의 뜻하는 바를 알려주는 어느 고을의 문화가 되기도 했다.
한 번 자리 잡은 터전을 떠나기 싫어하는 것은 그 터에 조상들이 남긴 숨결과 흔적들이 대대손손으로 이어져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에 집은 새로 짓는 한이 있더라도 터만은 떠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예나 제나 땅을 중요시 해 이것을 많이 소유한 사람들이 떵떵거리며 살고 있음을 봐도 땅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땅덩어리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터에서 세계 경제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정도의 반열班列에 오르기 까지 기적 같은 눈부신 발전이 있었음을 자인하며 자긍심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전국 어디서나 그 개발로 인한 터의 상처가 얼마나 컸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런데 이러한 흔적들, 터에 남아 있는 무늬들을 없애려고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다 지워버렸으니 그야말로 우리 사는 세상 터 모두가 터무니 없어진 꼴이 되었다.
유목민들은 떠돌아다니며 삶을 이어간다. 땅에다 터를 닦아 정주定住한다는 것은 농경사회의 주거양식이다.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겠지만 농경사회는 유목사회보다는 삶이 안정적이고 풍요롭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땅을 이용하는 민족마다 땅에 대한 의미와 생각이 다를 수 있는데, 정주한다는 것은 유목민들과 달리 땅에다 삶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며 역사와 기억을 적층積層하는 과정이랄 수 있는 것이다.
한 번 자리 잡은 터에 굳건히 터를 지키며 ‘나는 내다.’라고 의연한 자태로 있어야 할 역사적 건물이나 기념물 등이 전쟁으로 사라진 것도 억울한 데, 소위 경제적인 논리만으로 개발, 사라진 터의 무늬들을 살리려는 노력은 무시당한 채로 발전만 추구한 결과 많은 수가 되돌릴 수 없게 된 점에 대하여 건축을 업으로 하는 한 사람으로서 아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이 옳고 그름을 떠나 어느 종種이나 유무형有無形의 사실들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일은 참으로 안타가운 일이다. 그것이 비단 생명이 있는 생물뿐이 아니고 터에 자리하고 살아왔던 시대적 인간들의 흔적들에게도 같은 생각이다.
우리 조상들은 집을 지을 때 양택陽宅을 위한 터를 선호했고 한 번 자리 잡은 터는 그 곳에 많은 흔적을 남기며 자자손손子子孫孫 번영하면서 살아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곳을 떠나 다른 곳에 가서 산다면 한 순간 터에 대한 근거인 ‘터무니’는 살아져 회복 불가능한 ‘터무니없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터무니없는 삶이란 사전적인 말대로 근거 없는 삶이 되는 것이니 이곳저곳 땅에 투기하고 몰려다니며 사는 요즘 사람들이 모두 터무니없이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건축물들은 자의든 타의든, 어떤 의도로 세워졌든 간에 결국 무너져 사라진다. 그러나 그를 받치고 있던 터는 또 다른 의미의 건물을 받아드려 무늬를 남기려 할 것이지만, 세世와 대代를 이어오면서 새겨진 무늬를 이어 갈 우리가 거기에 있었다는 진실만은 흔적으로 남아 세월 흐름에 역사로 간직될 것이다.
터에 무조건 용도를 정해 놓고 건폐율建蔽率과 용적률容積率로 규제만 할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흔적이 남아있던 터에 대한 무늬를 인식하고 존중해 그 터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환경과 정신, 문화까지도 최대한 배려해서 더 이상 터무니없이 사는 사람들이 줄어들었으면 하는 생각이고, 불가피하게 터의 흔적을 없앨 수밖에 없다면 최소한 그 흔적의 개념만이라도 살려 컨셉을 정해 기획을 하고 시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 터를 사랑이고 터에 대한 무늬를 아끼려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그래야 인본위주의의 친환경 개발이며, 오래 오래 버티고 서서 터를 대변하는 상징물로서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남긴 터무니가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소의 특성을 시각화視覺化하는 우리의 건축행위建築行爲>는 그 장구한 역사를 체험해 온 땅이 새롭게 요구하는 말을 경청하는 것으로 시작하여야 하고, 온갖 예의를 갖추어 그 경이로운 언어를 들추어내 깊이 사유思惟하며 새로운 시어詩語를 그 위에 겸손히 지어 덧대는 일이 건축이다.”라고 말한 수잔 랭거Susanne K, Langer(1895-1985 미학자)의 건축建築에 대해 시사하는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국가 안보 최전방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서해 5도 섬사람들이 불안해하지 않고 터무닐 그릴 수 있도록 완벽한 국방의 보강은 물론 국민적 안보의식에도 더 관심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고, 북의 만행으로 숨진 장명과 민간인 사망자들에게 명복을 비는 바이다.
난민들이 하루 빨리 삶터로 돌아가 터에 무늬를 그리며 살기를 바라고, 아울러 피해를 입은 연평도 난민들에게 지금까지 무료로 그 많은 사람들의 생계와 보호를 위해 애써 주시는 인천의 모 찜질방 사장께도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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