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낚시는 이런 날도 좋다.
“드문드문 입질 해주는 대형 붕어들이 힘세게 매달리니 이놈들도 이 할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해 주려고 그러는지 앙탈 대며 끌려오는 폼이 손맛으로 오롯이 전달되어 생일날 쿨 했던 늙은 조사釣士의 마음을 달래주니 이래서 낚시는 나에게 있어 열심지취悅心之趣인 것이다.” 2011.09.14
<누가 끓이느냐에 따라 미역국맛은 다르다>
생일은 누구에게나 의미 있는 날이다. 어머니 쪽에서는 드디어 가족을 이뤘다는 뿌듯함에 행복해 할 것이고, 아기 입장에서는 처음으로 햇빛을 보고 산소를 들이마시며 한 생명으로서의 독립체로 자리 매김하면서 가계家系의 손을 이어감은 물론 인류의 한 구성원構成員으로서의 삶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첫날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생일을 맞는 본인은 물론 축하해 주는 사람들이 이 날을 기억하고 조촐한 음식을 나눠 먹으며 기뻐하는 날인 것이다.
신생아 입장에서 보면 캄캄한 어머니의 자궁을 빠져 나올 때 귀 부분이 가장 힘들다고 하여 ‘귀 빠진 날’이라고도 한다. 귀를 벗어나 머리가 나오면 비로소 몸이 아무리 커도 쉽게 나온다고 하는데 산모의 말인지 의사의 말인지 누가 그런걸 알고 세상 밖으로 나왔을까?
생일은 반드시 기준이 되는 시각이 있는데 엄마의 뱃속과 태아胎兒의 배를 연결했던 탯줄을 자르는 순간을 출생시각으로 삼는다고 한다. 비로소 어머니와의 독립이 이루어지는 때이기 때문이다. 그 흔적痕迹으로 남는 것이 우리가 잘 아는 바로 배꼽인 것이다.
나의 귀빠진 날은 음력으로 하여 추석 이튿날이다. 한가윗날 다음날이니 생일의 의미가 약간 퇴색退色되어 그런지 생일날이라고 축하 받기가 뭐 그런 날이다. 신경 안 쓰면 잊어먹고 그냥 지나가는 해도 있었다. 명절 때는 고향에 어머님을 찾아뵙고 함께 보내는 때는 늘 모친께서 둘째 아들 생일이라고 미역국을 끓여 주셔서 추석과 함께 나의 생일을 맞는 이중의 즐거움도 없지 않았으나 어머니께서는 내가 태어났던 해는 조상님 차례가 걱정이 되어 “네가 추석날 나오면 어찌할꼬!”하면서 노심초사勞心焦思하셨다는 이야길 자주 하셨었다.
그러고 보니 형제들 중 나를 포함. 추석을 전후하여 여동생 둘이 생일이 있고, 막내 여동생은 설 명절 다음날이 생일이니 삼신할머니가 점지해준 자식들이 나 하나가 아니고 넷씩이나 당시 명절을 전후하여 산통産痛을 치러야 했던 어머니의 마음을 자식들이 어찌 알고 태어났으랴?
그냥 생일이 다가오면 따듯한 미역국 한 그릇 얻어먹는 날이라기보다는 나를 낳아 길러 주신 부모님에게 먼저 감사드려야 하는 날인 줄을 이 나이가 들어서 알았으니 사람이 철이 든다는 것이 때가 없는 모양이다.
바로 어제. 생일이라고 누가 뭐 맛있는 음식을 잔뜩 차려 놓고 축가를 불러 줄 일도 없고 해서 내 손으로 미역국이나 끓여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일어나 미역을 물에 불려 놓고 잠시 누워 있다는 것이 그만 되 잠이 들었었는가 보다. 평소 같이 새벽운동이나 나갈까 하다가 생일날까지 뭐 그러랴 싶어 마음 놓고 잔 것이 아마 9시를 훨씬 넘을 시각에 깨어난 것 같다.
평소 같으면 출근 준비를 해야 할 그 시각에 일어났으니 아침 잠 시간이 후딱 지나간 모양이다.
며칠 전. 재래 전통시장인 동래시장 안에서 파는 칼국수를 친구와 함께 맛있게 먹고 나오면서 지나는 길에 시장 밖에서 미역을 파는 할머니에게 일부러 다가가 사다 놓은 미역인데, 기장미역이라 아주 맛이 좋다는 할머니의 권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어머니 같은 모습에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생겨 못 이기는 척하고 미역고다리를 집어 들어 산 것이다.
미역을 쪼물쪼물 빨아 놓고 소고기를 둘둘 볶다가 미역과 함께 양념을 하여 국을 끓였다. 전날 오빠 생일이라며 시골의 여동생한테 전화가 걸려와 당부하는 소리가 기억에 났다. “생일 축하해요. 오빠! 미역국은 오래 푹 끓여야 제 맛이 나요”
뭐가 잘못되어 아내가 끓여주는 미역국 한 그릇도 얻어먹지 못하고 남자 망신 떠냐고 흉볼지 모르겠으나 생일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아직까지 자고 있는 아내를 깨워 그 부산을 떨게 할까싶어 내 손으로 국 한 번 끓여 봐야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던 그 미역국이 다행이 제법 맛이 있었다. 뭐 별 비법秘法이 있는 게 아니고 동생 말만 믿고 그저 간 맞춰 오래 끓였더니 미역이 소고기와 어우러져 부드럽고 맛나게 끓여 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왜 생일날은 반드시 미역국을 끓여먹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꼭 그래서라기보다 어차피 국을 먹어야 하는 입장에서 미역국을 생일에 맞춰 끓인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건데 국 맛과 달리 마음은 개운치가 않으니 별꼴 다 볼 일이다.
먼 미국의 아들과 며느리로부터 축하전화를 받고 가만히 생각하니 나도 별 수 없이 늙어가면서 어린아이 마음인 것처럼 속마음이 쿨 해지고 속 좁은 밴댕이 꼴이 된 것 같아 자신이 미워진다.
남들도 생일이라도 축하 메시지가 발발이 오는데, 남의 일 보는 듯이 그때까지 잠만 자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기도 하고 연휴 끝이라 지겹기도 하여 근처의 낚시터로 가방을 들쳐 메고 훌훌 내 달려갔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생일날이라고 끓여 먹은 미역국이 다시 밖으로 나와 바다로 갈 것 같아 대충 챙겨 메 들고 낚시터에 다다르니 휴일 끝이라 그런지 제법 많은 태공들이 떡붕얼 낚아내는 물장구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온다.
좌대座臺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으려니 관리인이자 사장이 다가와 냉커피 캔을 내 밀며 명절 인사를 건넨다. “사장님. 명절 잘 보내셨읍니까? 사장님이 안 오시는 사이 저희 집 호야와 똘이가 제 각각 새끼를 다섯 마리씩이나 나서 완전히 개 부자가 됐습니다. 온통 개판입니다. 허허!”
호야와 똘이는 이 낚시터에서 기르는 개의 이름이다. 나는 개를 워낙 좋아하는지라 축하한다는 이야길 건네고 있는 사이 호야라는 산모견이 온통 부은 듯이 통통한 젖가슴을 덜렁거리며 다가오더니 반갑다고 꼬릴 치면서 발광을 떤다. 호야라는 개는 털이 얼룩얼룩하여 호랑이 털 무늬를 하고 있어서 이름 지어진 개인데, 낚실 갈 때마다 가끔 성견용成犬用 간식거리인 육포肉脯를 주고 했더니 나만 가면 혹시 또 주려나 하고 그러는지 곁에 다가와 한 참을 앉아있다 가곤 하던 사이였다.
그러고 보니 어느 봄날 처음 교미하던 때가 생각이 났다. “호야! 처음은 다 아픈 거야. 그런 거야!”라며 성견이 되어 처음 발정기를 맞고 사랑을 하던 때 아프다고 교성嬌聲을 내는 모습을 듣고 어느 조사釣士가 장난 끼가 발동했는지 농담으로 했던 그 말에 물가에 둘러 앉아 낚시를 하며 개의 교미 모습을 처다 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까르르! 웃었었는데, 벌써 어미가 되어 나름의 육아에 온 정신을 쏟고 있는 걸 보고 있으니 짐승이나 사람이나 다름없이 자식에 대한 사랑은 무작정 ‘한 없이 내려가는 정’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느끼게 했다.
본시동복생本時同腹生이니, 원래 한 배에서 태어난 강아지들이 아직은 엄마 품에서 형제들과 아무 생각 없이 젖이나 빨고 있겠지만, 한 달 여만 지나면 어미 품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견생犬生을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하등동물들의 삶이 그렇게 살도록 운명 지어 졌을 것이긴 해도 참 안타까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할아버지의 속마음도 모른 채 저의 엄마 손에 이끌려 우르르 몰려와 외할아버지 생일날이라고 촛불 켜 놓고 축가祝歌를 불러 대는 외손자 놈들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르겠고, 이것들조차 먼 곳에 살고 있었으면 짧은 행복도 맛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옛날 생전의 어머니 모시고 방안 가득 모여 축가를 불러 대던 때가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한 세대가 흘러 간 일이니 조금 서운한 점이 있어도 그래도 ‘나는 참으로 행복한 할아버지다.’라고 여겨야지 어쩌겠는가?
이날따라 살랑대는 가을바람이 상쾌하게 불어줘 기분조차 업 되는 때, 드문드문 입질 해주는 대형 붕어들이 힘세게 매달리니 이놈들도 이 할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해 주려고 그러는지 앙탈 대며 끌려오는 폼이 손맛으로 오롯이 전달되어 생일날 쿨 했던 늙은 조사釣士의 마음을 달래주니 이래서 낚시는 나에게 있어 열심지취悅心之趣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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