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룽지 한 그릇의 행복
“뜬금없이 여동생이 보내 준 누룽지를 끓여 먹고 있으니 불현듯 식구들의 밥을 퍼주고 남은 멀건 누룽지나 한 술 들고 들어와 잡수시던 어머님의 누룽지그릇을 넘보며 더 먹겠다고 숟가락을 집어넣던 철없던 어린 시절과 큰어머님에 대한 추억이 함께 솔솔 풍기는 구수한 냄새와 어우러져 누룽지 냄비 속에서 찾아온 작은 행복이 인다.” 2011.12.15
<옛날은 누룽지 한 그릇이면 끼니를 때웠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민족 중에서도 우리나라 사람들 같이 누룽지를 좋아하는 민족이 드물다고 하는데, 요새야 일부러 만들어 상품화가 돼있어 언제든지 먹을 수 있지만, 옛날 같으면 누룽지 한 그릇도 한 끼니거리였다.
그저, 누룽지 하면 요사이 같은 겨울철이 제격이다. 노릇노릇 잘 누른 누룽지를 푹 끓여 숭늉과 함께 먹으면 몸이 더워지면서 금세 추윌 잊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내가 학교공부를 마치고 교문을 나서는 것은 유도柔道 체육관에서 운동을 마쳐야 끝이 났다. 점심으로 싸온 도시락은 새벽밥을 먹고 나온 터라 점심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먹어 치웠으니 이 시간대가 되면 배가 고프기 시작한다. 기차 통학생들은 대부분 이랬었다.
옛날 어른들은 배 쉽게 꺼진다고 뛰놀지도 못하게 했다는데, 땀 흘려 운동까지 하고 났으니 저녁을 먹기까지 많은 시간을 견디기가 고통에 가까웠다.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또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걸어서 한 시간을 가야만 집에 도착하여 꿀맛 같은 저녁을 먹게 된다. 그리곤 식곤증에 의해 바로 곯아떨어지는 날이 많았던 게 나의 학창시절이었다.
요즘 같이 해가 짧은 계절에 남들은 야식이나 야참을 먹을 한 밤중에나 늦은 저녁을 먹게 되니 그 시각까지 배를 채우지 못해 허우적거리며 통학열차를 타고 다니며 공불 했었다. 운동을 마치고 기차시각에 맞추기 위해 대전의 삼성동 골목길을 걸어 다닐 때이다. 이런 때 삼삼오오 무리 진 학생들이 교문 앞 빵집에서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을 먹고 있는 모습들이 부러워서 그런지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끝이지 않았다. 가장 배고픈 시간대에 그곳을 지나는 일이 괴로웠다.
백부님이 일찍 돌아가시니 생계를 위해 큰 어머님께서 우리 학교 울타리를 옆에 두고 학생들에게 하숙을 놓으시며 생활하셨던 큰아버지 댁이 있었는데, 가끔 있는 일이지만 이런 때 나도 모르는 사이 발걸음이 자동으로 그리로 돌려졌다. 무엇이던지 먹을 것을 주는 대로 얻어먹고 갈 요량이었다.
축 늘어진 어깨로 들어서서는 책가방을 마루에 툭 집어 던지고 앉아 있는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하듯 큰어머님이 “아이고, 형진이 왔구나. 배고프지? 조금만 앉아 있거라”하시며 금세 끓여 주시는 누룽지의 그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기자감식飢者甘食이라. 배가 고프면 밥맛이 달게 마련이다. 반찬도 없이 간장 한 종지와 함께 주시는 그 누룽지였지만, 배고픈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야 말로 게 눈 감추듯 후딱 먹어 치우는 모습을 보곤 안쓰러워하시며 “하기야 쇳덩이도 녹일 나인데 그깟 걸로 배가 부르겠냐? 집까지 갈려면 아직 멀었는데……,”하시며 늘 부족해 하는 나를 위로 하시곤 했었다.
학철부어涸轍鮒魚라는 말이 있다.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있는 붕어의 신세. 몹시 위급한 형세나 곤란한 처지에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전국시대 사상가인 장자莊子라는 사람이 경제적으로 하도 곤란을 겪게 되자 고관高官으로 있는 친구에게 돈을 좀 빌리러 갔다가 세금이 들어오면 많이 빌려 주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돌아서며 했던 말이다.
[내가 이리로 오고 있는데 어디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네. 두리번거렸더니 물이 조금 괴어 있는 수레바퀴 자국 안에 붕어 한 마리가 버둥거리고 있었는데 나에게 다급히 도움을 청하더군. 물 몇 바가지만 떠다가 살려 달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말했지. ‘좋아. 내가 이삼일 있으면 남쪽으로 유세 갈 일이 있는데 그 길에 그 곳 서강西江의 물을 잔뜩 갖다 줄게.’ 그랬더니 붕어가 화를 내며 말하더군. ‘난 지금 몇 바가지의 물만 있으면 살 수 있는데 당신은 그 따위로 말하는군요. 나중에 건어물 점에나 가서 나를 찾아보시오’ 하더군.]
붕어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복창 터질 소릴 하고 있는 것이다. 수레가 지나가기만 하면 수레바퀴 밑에 있는 단 몇 모금의 물까지도 옆으로 흘러가 죽어야 할 다급한 상황이라 우선 단 한 바가지의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붕어를 살리기 위해 먼 곳의 강물까지 필요하겠는가? 남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가진 자로서의 중요한 덕목인 나눔과 베풂이 없이 오히려 거만을 떤다는 내용을 이 말은 전하고 있는 고사故事이다.
면박을 받고 돌아서는 장자의 마음이야 얼마나 서운 했을까마는 ‘앓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속담과 같이 누룽지 한 그릇이면 허기를 면할 것을 호남평야에서 쌀가마가 올라오면 그 때 배부르게 하얀 이밥을 해 주겠다는 말과 같아 그때 큰어머님의 온정이 없었더라면 차라리 배곯아 죽는 일이 있어도 다시는 찾지 않았을 것이지만, 다른 식구들의 눈치를 내색 않고 끓여 준 누룽지 한 그릇에 담긴 백모님의 배려가 고마웠던 것이다.
올해 우리나라가 세계 아홉 번째로 무역규모 1조 달러를 넘어섰다는 소릴 듣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 함께 가슴 벅찬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6.25 전쟁의 상흔傷痕과 폐허를 딛고, 저속한 말로 ‘빌어먹고 살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바뀐 가운데 이 부분에서 독일·프랑스·일본·중국·미국·네덜란드·영국·이탈리아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무역량 선진대국 반열에 들어섰다는 말이니 참으로 대단한 국민이라고 자부할만하다.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라. 논어論語의 이인里仁편에 나오는 말이다. 즉 덕德이 있으면 외롭지 않아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으로 곧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따르는 무리가 있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다시 말하면 덕을 베풀고 사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덕이 있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에 외로울 수 없다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인 것이다.
세모歲暮가 되니 구세군의 빨간 자선냄비가 저잣거리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의 성금을 모금하고 있는 걸 보게 되는데, 경제여건이 어려운 때라 그런지 그 곳에 성금을 넣고 가는 사람의 숫자가 그리 많게는 안 보여 열심히 흔들어 대는 구세군의 종소리가 더 힘겹게 느껴져 무역 선진국이라는 말이 어쩐지 씁쓸하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얼마 전 일 억여 원이 넘는 액수를 얼굴 없이 넣어 일회 성금으로는 최대액수라는 보도를 들은 적이 있다.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을 몸소 실천하려는 이런 사람은 반드시 하느님이 다른 쪽에서 그만큼의 복을 내려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비단 어려운 때이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런 사람들이 있어 올 한 해도 많은 수의 경제적 약자들이 마음 훈훈한 연말연시를 맞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느 날. 택배가 왔다는 경비원의 말을 듣고 내려가 찾아와 열어 보니 고맙게도 청주 근교 모 고등학교에서 영양사로 일하는 막내 여동생으로부터 부쳐온 누룽지였다. 부대를 열어 보니 두툼한 모양으로 크고 작게 제멋대로 생긴 것들이 뒤 섞인 채 조금 누른 것과 많이 누른 것 등이 혼합되어 마트에서 파는 제품과는 여러 모로 달랐지만, 그래도 정성이 들어간 수제手製 아닌가?
먼 곳에서 오라버니를 생각하며 손수 만들었을 누룽지를 받고 보니 기차 통학시절 큰 어머님께서 끓여 주시던 따끈한 누룽지에 대한 고마움의 마음과 오버랩 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큰어머님으로선 내가 배고플 때 비록 누룽지 한 그릇이 작지만 가장 큰 배려였다는 것을 알았을 땐 큰어머님도 세상에 안게시니 근사한 식사 한 번 대접해 드리지 못했음에 송구스럽기까지 하다.
뜬금없이 여동생이 보내 준 누룽지를 끓여 먹고 있으니 불현듯 식구들의 밥을 퍼주고 남은 멀건 누룽지나 한 술 들고 들어와 잡수시던 어머님의 누룽지그릇을 넘보며 더 먹겠다고 숟가락을 집어넣던 철없던 어린 시절과 큰어머님에 대한 추억이 함께 솔솔 풍기는 구수한 냄새와 어우러져 누룽지 냄비 속에서 찾아온 작은 행복이 인다.
큰어머님! 그 땐 정말 고마웠습니다.
막내 동생! 자네도 고마워.♣
'자전적 수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먹통 치료제, 소통 (0) | 2012.01.26 |
---|---|
◇ 붉은 색 십자가 (0) | 2011.12.22 |
◇ 세상은 보는 대로 보인다. (0) | 2011.11.24 |
◇ 거기 있어서 아름답다 (0) | 2011.11.14 |
◇ 낚시는 이런 날도 좋다. (0) | 2011.1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