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수필,시

◇ 고향의 맛과 정

이원아 2013. 8. 27. 12:25

 

 

◇ 고향의 맛과 정

 

 

 

           “비록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 살지만, 일 년에 한 두 차례씩 갖는 이런 모임을 통해 고향의 맛과 정을 함께 나누는 만남의 장이되니 동기간의 우애가 더욱 돈독해짐은 물론 형제자매 간에는 깊은 형제애兄弟愛를 느낄 수 있는 오붓한 시간이..................,”                                            2013.08.12

 

 

  

                     <함께하는 형제자매들이 사랑스럽다>                         

 

 

  TV를 통해 일기예보를 보고 들을 때마다 전국이 온통 폭염지역이다.

매일 같이 30℃ 를 웃도는 기온이 계속되니 지역에 따라 대부분의 도 시가 폭염경보라는 기상특보를 발령 중이다. 찜통더위, 가마솥더위라고도 하지만 체감적으로는 그야말로 살인적인 더위라 말할 수 있다. 다른 말로 이 더위를 어떻게 표현할 말이 없을 정도로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열대야熱帶夜까지 연일 계속되니 밤잠을 설치기 일쑤고 들에 나가 일하는 노약자 중에는 벌써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부산지역이 날씨 하나 만큼은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살기 좋은 고장인데, 올해는 그렇지 않은 면도 있는 것 같다. 보도에 따르면, 부산지역은 100년만의 마른장마라 북쪽 지방의 물난리에도 이곳은 예년의 강수량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30%도 밖에 안 내렸고, 그 기간 동안 더위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북쪽지방보다 오랜 기간 높은 기온이 계속돼 지내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매일 같이 기상이변을 발표하고 있는 기상청에 의하면, 부산의 아침 최저기온이 28℃라 하는데, 이 정도면 200년만의 더위 기록이라고 한다.

 

  다른 나라들도 예외가 아닌 듯싶다. 이웃의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열사병熱射病으로 인한 환자들이 속출하고 있고, 세계 곳곳에서 기상이변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모양이다. 한 편 전국이 전력부족에 따른 전력대란이 올 수 있다고 국민들에게 절전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걸 지키기에는 너무 더워 고통스럽고 무리가 따른다. 더위의 원인이 북극의 빙하가 많이 녹아내렸기 때문이라 하니 인간들이 자업自業한 결과대로 자득自得하고 있는 형국이니 앞으로도 속수무책으로 견디며 살아가야 할 판국이 되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덥다고 야단들이다.

 

  시원한 무엇을 먹어도 덥다. 그래서 요즘 필자는 마냥 에어컨을 틀어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라 오전 근무만하고 집에 일찍 퇴근하여 쉬는 것이 이 살인적 더위를 이기는 피서법이 되었다.

그렇게 지내고 있던 차-두어 달 전에 이미 약속한 일이지만-폭염이 극에 달하고 있는 지난 주말, 고향의 대성산大聖山(해발 705m)계곡에서 형제자매들과 모일 기회가 생겼다.

 

  9일, 여장을 준비해 부산의 재종 동생 차를 타고 8시 반쯤 일찍 출발했다. 피서의 피크타임이 지나서 그런지 고속도로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카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트롯 멜로디가 우리들의 고향길을 축하라도 해주듯 정겹게 들린다. 고향을 간다는 상기된 마음으로 달려 고향마을 이웃해 사는 여동생 집에 정오 쯤 도착하니 벌써 서울과 청주에 사는 동생들이 도착해 있어서 반갑게 맞아 준다.

 

  야영지가 가까운 거리라 점심은 그곳에 가 먹기로 하고 온갖 준비를 해 자동차에 나눠 타고 출발을 서둘렀다. 필자의 형제자매들과 매년 여름철 꼭 고향에 모여서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준비한 음식을 나눠먹으며 형제는 원래부터 본시동근생本是同根生임을 알아 돌아가는 모임인데, 올 해는 강변이 아닌 이 산 계곡에서 모임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산은 우리 고향마을(지정리)에서는 눈만 뜨면 마주 바라다 보이는 영산이다. 어딜 가나 이 산이 앞을 가로막은 듯 보이기 때문에 이 산을 벗어 날 수가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운무雲霧에 가린 모습이 신비로웠고, 저녁 무렵에는 시커먼 산 위로 만들어 지는 붉은 석양이 아름답게 보였는데, 어쩌다 봄철 산불이라도 나게 되면 며칠을 두고 타는 연기가 피어올라 모두를 안타깝게 했었다.

 

  멀리 보이긴 해도 유년시절 필자의 눈에는 여름 장마 때 큰 비라도 내리게 되면 산 중턱에 보이는 큰 폭포의 흰 물줄기가 신비할 정도로 기이하게 보였었고, 어른들은 그 폭포의 물줄기만을 보고도 강수량을 짐작하곤 하셨다. 이 산은 6개의 크고 작은 폭포와 기암들이 많아 산세가 험해도 근교는 물론 타지의 등산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명산이기 때문에 이 곳 고향사람들의 자랑이기도 한 산이다.

  필자는 일찍 고향을 떠나왔기 때문에 이 산을 매일 같이 눈으로만 처다 보았지 한 번도 올라보지 못하고 여태껏 살아왔었는데, 이번 기회에 처음 이 곳을 찾아서인지 낯선 어느 동네 산골짜기를 들어 온 느낌이 들었다.

 

  자고 일어나 보거나 어딜 가도 높게만 보였던 산, 대성산!

  옛날 초등학교 시절, 나와 내 형제들은 “대성산 정기 받아........(중략)” 어쩌고 하면서 조회朝會시간 때마다 교가를 목청껏 불렀던 추억어린 산이다. 오늘 형제들과 초등학교를 지나가며 바라보는 조그만 교정을 보니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자꾸만 눈길이 갔다. 의평리 마을-필자의 고향마을과 마주 보이는, 즉 대성산 밑에 자리한 마을-돌아 골짜기에 들어서니 저수지가 보였다.

 

  이 저수지는 내가 고향을 떠나기 전에는 없었었던 저수지 이었는데, 지금은 중국 붕어를 넣어두고 유료로 운영되는 낚시터라고 했다. 너무 더운 탓인지 꾼들은 보이지 않았다. 저수지를 지나 골짜기에 들어서니 산새들도 더위에 지친 듯 조용한 계곡에는 말매미 소리만이 엇박자로 계곡 가득 들려온다. 모두 마음이 들떠 있었다. 더위에 지친 몸들을 식혀주고 달래줄 그런 계곡에 차를 들이댔다.

  늦게까지 산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계곡물이 졸졸 흐르는 곳이었는데, 다행히 우리 일행뿐이어서 분위기가 호젓한 자갈밭에 터를 닦아놓고 짐을 부려 야영 준비를 했다.

 

  높은 산을 바라보니 바로 코앞에 서있는 것처럼 지금도 웅장하고 높아만 보였다. 어릴 적 눈으로만 그리던 대성산의 품에 안겨보는 느낌은 산이 바로 눈앞에 떡 버티고 서있어서 그런지 한 편 두렵기도 하고 한 편 대자연의 오묘한 모습이라 어떤 신비감마저 감도는 듯 했다. 산을 향해 등산로가 있었지만 산은 어느 곳이나 굴밤나무 숲 아래 칡넝쿨이 무성한 가운데 조금이라도 평평한 곳은 군락을 이룬 개망초 꽃들이 하얗게 피어 있었다.

 

  무리지어 핀 그 많은 꽃들이 더위와 상관없다는 듯 하늘거리는 모습들이 그냥 잡초로 보기보단 매우 정겹게 보였다. 고향에서 보는 풀 한 포기나 나무 한 그루는 도심 근교에서 보는 그것들과는 확연히 다르게 정감이 가는 것들이다. 흔히 보는 야생화野生花일지라도 손 안 가득 꺾어 들고 다니며 동무들에게 자랑을 했던 추억이 함께 깃든 꽃들이기 때문에 눈에 띠는 꽃들마다 이름도 불러보고 정겹게 쳐다보며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했다.

 

  언젠가 필자가 고향 땅에서 사라져 간 미루나무에서 유년시절의 추억까지 사라진 모습을 안타가워 했었는데, 오늘 여기에 들러 바라보는 산에서 개암나무라던가 굴밤나무들은 새삼 어릴 적의 추억들이 상기되니 정말 반가웠다. 이런 마음들은 나무나 숲이 주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요즘 웰빙의 가치라는 점에서 정서적으로 마음을 순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니 그 자체만으로 이번 형제들과 함께하는 피서모임에서 덤으로 얻은 행복감이 가슴에 녹아든다.

 

  특히 객지에서 온 여 동생들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금세 시골 분위기에 젖어 든다. 자갈밭을 여럿이 힘을 합해 앉을 자리를 마련하니 금방 천막이 쳐지고 깔 자리가 준비됐다. 땀을 흘리고 나 모두들 찬물에 발을 담그며 몸을 씻는데, 한결같이 “아! 정말 시원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살인적이 무더위도 여기서는 위력이 없었다.

 

  자연은 누굴 싫어하고 좋아하고 하는 일이 없다. 한 줄기 계곡물이지만 저 높은 산에서 만들어진 찬물을 흘려보내며 누구에게나 시원하게 몸을 씻도록 허락해 준다. 도심의 그 어느 곳에서 맛보지 못한 순수 자연산 물이요, 공기요, 나무들이니 모두 다 내 것인 양 풍족하게 보였다.

 

  점심은 시골에 사는 여동생이 모임을 위해 손수 애써 만들어 온 것들로 간단히 소박하게 차려졌지만 그 맛은 그야말로 어머니 적에 먹어봤던 고향의 그런 맛이었다. 바구니에 수북하게 담아 쪄낸 호박잎 메밀된장무침, 풋고추, 길쭉한 오이지와 정구지된장국, 참비름된장무침, 어린 메밀 순 무침 등 어느 것 하나 빼 놀 수 없이 어릴 적에 즐겨 먹었던 고향의 맛이 잔뜩 밴 그런 것들이니 더욱 맛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들을 함께 넣어 비벼먹는 점심은 그 맛을 어디에 비할쏘냐?

 

  한 잔술에 건배가 끝나니 그간 살아왔던 이야기며 아이들의 장래나 손자들의 이야기, 건강 이야기, 이웃의 이야기들이 끝이지 않고 오후 내내 이어가며 화기애애한 가운데 피붙이만이 갖는 오붓한 시간이 되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조카들도 들락거리며 자리를 함께해주니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니 앞으로 그들이 잘 살아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애정 공세를 퍼부어 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어둑해 지자 저수지를 내려다보니 밤낚시꾼들이 왔는지 케미컬 라이트 찌가 수면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것이 제법 보였다. 남동생과 조카 놈은 저수지로 밤낚시를 갔지만, 여동생들은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도 많은지 밤이 이슥하도록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운다.

  비록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 살지만, 일 년에 한 두 차례씩 갖는 이런 모임을 통해 고향의 맛과 정을 함께 나누는 만남의 장이되니 동기간의 우애가 더욱 돈독해짐은 물론 형제자매 간에는 깊은 형제애兄弟愛를 느낄 수 있는 오붓한 시간이 되는 것이다.

 

  이제 부모님 슬하에 태어난 형제자매들 중 필자가 가장 나이 많은 연장자年長者로서 이런 모습을 보는 내내 뿌듯한 감정이 복받쳐 올랐고, 특별히 대접해 주는 동생들이 한 없이 사랑스러웠음은 두 말할 필요 없이 고마웠다. 평소 술을 잘 하지 않지만 오늘만은 취하고 싶었다.저녁 내내 동생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도록 격려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다독이며 주고받는 한 잔 술에 취기가 오르니 천국에 온 것처럼 느껴진다.

 

  이튿날, 금강에 나가 초망으로 잡은 여러 종류의 물고기로 어죽도 끓여 먹고 하며 지내는 사이 2박 3일이 금세 지나갔다. 모두들 아쉬워했지만 다음을 약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이고, 동생들아! 이제 헤어지려고 하니 섭섭한 생각이 먼저 드는 구나. 나는 너희들을 이렇게 만날 때마다 건강하게 잘 살고 있어 마음 든든했고, 또 너희들이 있음에 매우 행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에도 맛있는 음식을 많이 준비해 준 여동생들에게 정말 고마움을 표하고 싶구나. 이렇게 우리 다 모여 올 여름휴가도 잘 보내고 했으니 건강하게 잘 지내고, 각자의 삶에서 행복을 찾는 일에 열심히 살다 다음에 다시 만남을 기약하자. 고맙다. 동생들아!”

“우리 모두의 건강을 위하여, 건배!”

 

  건배 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듯 힘차게 울렸다. 마지막으로 생질 놈이 아끼던 더덕 주를 한 잔씩 높이 들고 건배를 마치고 나니 불현 듯 헤어짐이 섭섭해 졌다. 이제 모두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시골에 사는 여동생은 직접 농사지은 마른 고추며 밑반찬 등을 조막 조막 싸서 차에 실어 준다. 무엇이던지 나눠주려고 하는 동생의 갸륵한 마음씨에 늘 고마워하면서도 남편 없이 혼자 그 많은 농사일을 해내고 고침한등孤枕寒燈한 채로 청춘을 다 보내며 사는 이 동생이 늘 마음에 걸린다.

 

  이렇게 부산을 떨다 뿔뿔이 제 살 곳을 찾아 가야하는 형제들과 헤어지고 나면 허전한 마음을 일상의 일로 달래야 할 것이지만, 우리 모두 피붙이에 대한 사랑과 우애를 듬뿍 앉고 본연의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

  자두연기煮豆燃箕라는 말이 있다. 콩과 콩깍지는 본시 한 뿌리에서 나왔는데, 콩을 삶는데 콩대를 땔감으로 쓴다는 뜻이니 형제간의 다툼을 뜻하는 말이다. 우리들은 한 부모 밑에 피를 나눈 혈육이요 동기간 아니더냐? 여족여수如足如手처럼 다툼 없이 우애 있게 잘 지내자.

 

  도시에서 볼 수 없었던 그 수많은 별빛 아래서 이야기꽃을 피우며 정을 나눴고 아쉬움을 간직한 채 석별의 정을 나누었는데도 “오빠, 잘 가.―”라고 차창까지 손을 내밀며 배웅하고 돌아섰던 여동생들의 뒷모습에서 표현할 수 없는 쓸쓸함에 가슴이 먹먹해 왔지만, 고향의 오롯한 맛과 정을 동생들로부터 얻고 떠나오는 나의 행복한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길게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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